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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 치명자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순교자의 안식처
지번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 11-1 
도로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92
전화번호 (063)285-5755
팩스번호 (063)285-5756
홈페이지 http://www.joanlugalda.com/
문화정보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유항검 일가 합장묘)
박해시대의 동정부부

우리 나라 박해시대의 기록에 보면 몇 쌍의 동정부부를 확인하게 된다. 동정부부는 혼인한 뒤에도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고 동정성을 지키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 상식과 매우 다른 삶을 살았지만,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동정부부의 존재는 19세기 당시 한국교회의 독특한 영성과, 수도원이 없었던 박해시대의 상황이 낳은 특이한 삶의 양식이었다.
 
동정부부가 출현하게 된 배경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양식 가운데 독신의 금욕생활을 특히 중시하였다. 이 점은 당시 신자들이 널리 읽던 한글 교리서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직해광익」에 나오는 삼왕래조(주님 공현 대축일) 후 제2주일 복음묵상에서는 교회의 회중들을 세 가지 품격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다.
 
곧, 상품으로는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중품으로는 과부나 홀아비가 된 다음 다시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하품으로는 지아비와 지어미가 함께 사는 혼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상품은 금이요, 중품은 은이며, 하품은 구리라고 비유하여 말했다. 이처럼 신자들을 그 삶의 방식에 따라 분명한 서열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등급이 정해진 까닭은 가족 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투신할 수 있는 삶을 동신(童身) 내지는 독신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세계교회사의 전통을 보면 금욕생활을 높게 평가하는 관행이 존속해 온다. 일부 이단사상에서는 혼인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혼인의 가치를 낮추어 평가했다. 예컨대, 서기 2세기경 타티아누스(Tatianus) 일파나 13세기 전후 알비(Albi)파 이단에서도 그리스도교적 금욕의 이상형으로 혼인 금지를 내세우다가 단죄되었다.
 
한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회에서는 얀세니즘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엄격한 신앙의 실천을 위한 금욕생활을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정적주의 이단에서도 혼인생활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럽 교회의 일부 비뚤어진 영성이 박해시대 한문교리서나 일부 선교사를 통해서 전래되었다. 여기에서 박해시대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금욕생활을 완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인식하고 동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영성적 분위기에서 동정부부가 탄생하였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의 실천이 불가능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수도생활을 지망하던 일부 신자들은 일종의 ‘위장 혼인’을 통해 동정부부로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살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동정부부는 19세기 한국교회의 교회사적 특성에 따라 출현한 삶의 한 형태였다.
 
동정부부의 사례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정부부로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를 들 수 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맏아들이다. 이들은 동정으로 살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문모 신부는 혼인이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처럼 살도록 주선하였다. 이순이가 남긴 한글 편지를 보면 동정부부로 살면서 10여 차례 동정부부 파기의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 뒤 4년 동안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지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동정부부에 관한 또 다른 사례는 유방제 신부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유 신부는 1834년에 입국한 뒤 ‘글라라’라는 신자를 만났다. 글라라는 혼인할 때부터 남편과 함께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약조하고 이를 실천해 오다가, 그의 ‘남편’은 신유박해 때에 주문모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이 사례에서 교회 창설 초기부터 동정부부들에 관한 사례가 여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도 동정부부이다. 권일신의 딸 권 데레사는 1804년 친척들의 권유로 조숙에게 시집을 갔다. 혼인 첫날밤 권 데레사는 조숙에게 동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알렸고, 원래 신자였던 조숙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동정부부로 15년 간을 함께 지냈고, 이 부부는 1819년 서울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 15년 동안 그들은 매일 순교해 왔을 것이다.
 
한편, 박해시대 교회사에서는 혼인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금욕생활로 전환했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유방제 신부는 ‘민(閔)가’라는 사람이 노년에 아내와 함께 하느님을 알아 정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고신극기를 실천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황석두도 그의 아내와 별거하면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했던 사람이다. 이들 이외에 홀아비나 과부가 다시 혼인을 아니하고 금욕생활을 실천한 사례들도 찾아볼 수 있다.
 
남은 말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동정부부들은 선교사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들이 정한 방법에 따라 동정부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통하여 금과 같은 상품의 신자생활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정부부의 관행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결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서유럽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 없었던 특이한 삶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천했던 신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터득한 이념적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주문모 신부가 선교하던 18세기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전개되며,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사목서한에서 수정(守貞)을 하고자 하는 부부도 사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동정부부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정부부의 풍조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점차 소멸되어 간 듯하다. 이는 주문모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동정부부 생활은 수도자의 영성에 대한 모방일 수 있다. 당시는 신자들의 영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일반 신자들은 일등이나 이등의 신분이 아닌 삼등급의 신분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에서는 사회 안에 살면서 누룩처럼 사회를 복음화시켜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만의 고유한 영성을 말하고 있다. 이 평신도 영성의 중요성이 성직자나 수도자 영성과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원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박해시대 동정부부의 ‘비정상적’ 삶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수행하려 했던 그들의 과감한 결의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깨우침을 재촉하는 죽비가 되어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2년 8월호]


우리 역사 속의 동정녀

동정은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신체적 순결성을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금욕적 삶의 형식은 이미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독신생활을 격려하기도 하였다(마태 19,10-12).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초기부터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고, 주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는”(1고린 7,32-34)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초창기부터 신체적 순결성을 존중하는 동정에 관한 적지 않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스스로 동정서원을 발하고, 이를 실천하는 동정생활을 택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동정녀의 길을 걸으며, 수도회가 없던 사회에서 수도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리하여 동정생활은 박해시대 이래 교회 안에서 중요한 삶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동정과 동정녀
 
1835년 조선에 입국하고자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을 안내해 준 중국인 신자 왕(王) 요셉을 통해 조선 교우들과 한문으로 글을 써서 문답을 나누었다.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에게 “조선 교우들 중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의 뜻을 조선인 신자들은 정확히 알아듣고 “여자들 가운데는 수절한 사람들이 많으나 남자 교우들 가운데는 그보다 적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화를 통해 박해시대 당시 조선인 신자들은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로 이해하였고, 남녀 수절 교우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박해시대 우리 교회사에는 여러 명의 동정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유박해(1801년) 때 윤점혜(아가타), 문영인(비비아나), 이순이(루갈다) 등을 비롯한 여러 명의 동정녀들의 기록이 있다. 을해박해(1815년) 때에는 동정생활을 그리다가 좌절된 이시임(안나)의 삶이 돋보이며, 기해박해(1839년)에서는 김효임(골룸바)과 김효주(아녜스) 자매를 비롯하여 그 밖의 동정녀들이 순교했다.
 
동정을 지키고자 하던 원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신도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순이와 함께 지내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을 남성 수절자로 먼저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1815년 대구에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도 한때 동정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김시우(알렉스), 최 마르티노도 동정서원을 발하고 수절자의 삶을 살았다. 조숙이나 정하상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들이 동정생활을 택하게 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하느님의 사업에 전념하여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1801년 당시 강완숙이 지도하던 여성공동체에서 같이 생활하던 동정녀들에게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동정녀 김효임의 증언을 통해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신문하던 관장에게 “천주교인들의 눈에는 동정이 더 완전한 지위로 생각되며, 자기들은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편, 당시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나 성 요셉을 비롯한 로마 시대의 박해에서 순교한 동정녀들에 대한 신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 내에 감돌던 이 같은 정서적 배경도 그들의 동정생활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동정녀들의 생활
 
교회사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들은 기도와 금욕생활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동정생활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다. 정약종의 딸 정정혜(엘리사벳)의 경우에는 동정을 서원했지만, 30세쯤 되었을 때 2년 이상이나 강력한 유혹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반발하는 육체를 끊임없는 극기와 금식기도[大齋]로 공격하고, 주야로 하늘의 배필이신 예수께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눈물은 마침내 승리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동정녀들 가운데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대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편, 동정녀들은 그 긴 기도문들을 외웠고, 기도의 정신이 가득해서 밭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곤란을 덜어주려고 필요한 것까지 포기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그들은 굳은 신앙을 가지고 순교에 임해서도 다른 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고통과 보람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동정이라는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유교 문화는 나이가 차면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고 떳떳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방에 부임한 수령들도 의지가지 없는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고 과년한 사람들의 혼인을 주선하는 일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유교적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이해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1839년에 발표된 ‘척사윤음’에서는 “음양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가 있음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인데, 저들은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은 것을 망녕되이 정덕이라 가탁하니, 이로 말하면 인류가 소멸될 것이다.” 하고 지적했다.
 
정부에서 동정을 거부하던 것과는 다른 이유로 당시의 교회에서도 동정생활에 신중을 기하도록 했다. 물론 18세기 말엽 교회 창설 초기에는 주문모 신부 등에 의해 동정생활이 인정되고 축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신자들에게 사목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성교회법에 동정 지키고자 하는 자가 혼자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법이라. 마땅히 탁덕과 자세히 의론하여 할 것이니, 그 허락 없으면 아니 되며, 수정(守貞)하고자 하는 부부도 이 법과 같이 할지니라.”
 
남은 말
 
19세기 중엽의 교회에서 동정허원과 동정생활을 제한하고자 했던 일은 하느님께 대한 허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교리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의 그 말은 당시의 문화풍토를 감안한 말이었다. 곧, 당시 조선의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유별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동정생활은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박해를 자초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정녀를 둔 신자 가정에서는 적지 않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신도들에게 동정생활은 새롭게 터득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동정생활을 결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절을 중시하던 유교적 문화풍토나, 독신생활을 기본으로 한 불교적 수행의 전통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동정생활은 이러한 전통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기존 문화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실험하고 있었고, 새로운 삶이 통할 수 있는 새 사회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완덕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동정부부로
 
유중철(柳重哲 요한, 1779-1801년)은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마을에서 아버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과 어머니 신희(申喜, ?-1801년)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신앙과 교육으로, 그를 본 사람들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님이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고,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1782-1801년)는 서울 중림동에서 아버지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1757-1793년)와 어머니 권씨(1754-1835년)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오빠인 이경도 가롤로는 1801년에 서울에서, 동생 이경언 바오로는 1827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2008년 1월호 참조).
 
그녀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님께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신을 거룩하게 보존하고 예수님을 영혼의 배우자로 삼아 사랑하는 주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동정으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살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네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3세기에 순교한 동정순교자 아가타 성녀였습니다.
 
유교사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797년 딸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주 신부님과 상의를 하였고 신부님은 유중철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자식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완덕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기를 열망하는 두 남녀의 성소를 지켜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려 둘이 동정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혼인을 주선하였습니다.
 
드디어 1798년 10월 둘은 시부모 앞에서 동정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재산과 가업을 물려주시면 서너 몫으로 나누어서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한 몫은 시동생에게 넉넉하게 주어 시부모님을 모시도록 하고, 세상이 좋아져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 각각 헤어져 살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렇게 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동정부부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동정서약을 어길 유혹이 생길 때마다 둘은 믿음과 사랑 속에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며 4년의 살얼음판 같은 동정살이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피묻은 쌍백합, ‘누이여, 하늘나라에 가서 만납시다’
 
유중철 요한은 1801년 3월 초순 신유박해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 옥에 갇혀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다가 그해 음력 10월 9일 교수형으로 동생 문석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유품 속에 루갈다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는데, 신앙을 잘 지켜나갈 것을 당부하고 위로하며, “누이여, 하늘나라에 가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한에게 루갈다는 믿음의 아내, 희망의 벗, 성실한 사랑의 반려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주신 은총이었습니다.
 
이순이 루갈다는 9월 중순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끌려갔습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서한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순교의 열매를 맺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도 자랑스러운 자식을 두었다고 여기실 것이고, 저 또한 어머니의 떳떳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 이 세상 삶을 다 마치시면, 못난 자식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영광을 받아, 가이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손을 마주잡고 하늘나라로 모셔 들여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렵니다.”
 
두 언니에게도 서한을 보냈습니다. “좋은 기회가 오면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칠 뜻을 마음속 깊이 정하고, 이 뜻을 가슴에 새기고 새기며 그 준비에 힘썼어요. … 시어머님, 시숙모님, 시동생, 시사촌동생과 더불어 다섯 사람이 서로 약속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고, 각자 결심한 뜻은 쇠와 돌처럼 아주 굳었어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뜻이 같으니, 가득한 믿음과 사랑이 다섯 사람 사이에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에 가슴에 가득 찼던 설움이 자연히 잊혀지고, 갈수록 주님 은총을 입어 영혼의 기쁨이 넘쳐나 아무 근심걱정이 없게 되고 마음에 걸리는 잡념이 사라졌어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돌아보아도 마음 둘 데가 없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하늘나라뿐입니다. … 언제나 힘껏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시고, 깊이 뉘우치는 뜨거운 사랑이 아주 없을지라도 힘써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간절히 구하면, 주님께서 착하게 살아 복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한때나마 방심하였거든 깊이 뉘우치고 깨우쳐서 열심히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리면 점점 주님께 가까워지실 것입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착한 일로 공을 쌓으시고, 몸 건강하시고 영혼과 육신을 정결하게 하시어 다 함께 하늘나라에 가서 대부모이신 하느님과 부모님을 즐겁게 모시고, 형제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라고 바라며, 죽어서도 끊임없이 주님께 간절히 청하겠습니다. …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 하지요. 곧 죽게 될 제가 드리는 이 말이 그르지 않을 것이니 꼭 명심해 주셔요.”
 
루갈다는 그해 음력 12월 28일에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두 분의 신앙과 삶을 본받고자 2001년부터 해마다 전주교구가 주최하고 전북, 전주시가 후원하는 순교현양 문화축제 ‘요한 루갈다’제가 열립니다. 1994년에 치명자산에 두 순교자의 기념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초남이 성지에서는 둘이 살았을 세 칸 한옥의 행랑채를 복원하고, ‘이순이(루갈다) 시집온 날’ 기념미사를 2001년부터 봉헌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오페라‘쌍백합, 요한 ∙ 루갈다’(호남 오페라단)가 전주에서 공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읽을 책으로는 “피묻은 쌍백합”(김구정, 가톨릭출판사), “누이여, 천국에서 만나자”(노순자, 성바오로),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김진소 편저, 호남교회사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출처 : 여진천 폰시아노, 원주교구 배론성지 담임,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남녀의 새로운 위상, 동정 부부 :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

들어가는 맡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넘치는 신앙에의 기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담은 글들을 남기고 있다. 그 글들은 일기나 편지의 형태로, 또는 “옥중기”나 “천주가사”의 형태로 그리고 저서로 정리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글들은 박해 시대 신자들이 가졌던 믿음이나 생각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 중에는 이순이(李順伊) 누갈다가 남긴 두 통의 편지가 있다. 흔히 ‘이 누갈다 서한’으로 불리고 있는 이 펀지는 1801년 신유 교난 당시의 우리 나라 교회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해줌과 동시에 순교를 목전에 둔 한 아녀자의 올곧고 고운 마음씨를 전해 주고 있다.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
 
이순이(1781~1802년)는 새로운 깨달음의 사태를 살았던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 질서가 이른바 ‘아랫것들’에 지나지 아니하던 민인(民人)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 문화는 서서히 흔들려 갔으며, 여성들의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지탱해 주던 성리학(性理學) 일변도의 사상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이를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일단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또한 이 새로운 신앙은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성장해 왔던 민중들에 의해 수용됨으로써 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천주교에는 선각적 지식인들과 억눌려 지내던 민중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던 여성들도 이 새로운 종교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이순이는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순교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순이와 그 형제들
 
우리 나라 여성의 이름 가운데 가장 순박하고 정감 어린 이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순이라는 이름이리라. 그러기에 예로부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순이’가 등장하고 있으며, 오늘의 작가들도 ‘순이’를 즐겨 들먹이고 있다. 우리 교회사에 나타나는 많은 여인 중에서도 ‘순이’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이순이’는 ‘강완숙’과 함께 초기 교회사의 전형적 인물이다.
 
순이네 집안 내력은 이러하다. 그의 아버지는 지봉 이수광(李晬光)의 후손인 이윤하(李潤夏)였다. 이윤하는 근기(近畿) 남인 계통의 지식인으로서 이가환(李家煥) 등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다. 순이의 어머니는 당시에 가장 저명한 학자였던 권철신(權哲身)의 동생이었다. 순이의 오라버니 이경도(李景陶)는 1801년의 박해 때 순교했고 오라비 이경언(李景彦)도 1827년에 순교했다. 물론 이순이도 1801년에 시작된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순교를 하여,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다 철저히 파괴되었던 초기 교회의 대표적 가문이다.
 
이순이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집안의 분위기에 힘입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새로운 신앙을 가장 철저히 실천하기 위해 동정의 삶을 살기로 했다. 이순이는 당시의 사회 관습상 호남 벌의 부호 유항검의 아들 중철(重哲)과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유중철과 이순이는 여느 부부들과는 달리 남매처럼 지냈던 동정 부부였다.
 
편지가 쓰여진 까닭
 
1801년은 우리 나라의 초기 교회에 있어서 무척이나 괴로운 시련의 시기였다. 이때 전국적인 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서울이나 경기 그리고 충청도 내포 지방과 전주에서는 신도들이 줄뒤짐을 당했고, 순교와 배교가 연이어 졌다.
 
이때 전주 지방의 대표적 신도였던 유항검도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가족 거의 모두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중철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했다. 유항검 · 유중철 가족 구성원 중 아녀자들은 당시의 연좌율(連坐律)에 의해 시골 관아의 관비(官婢)로 보내져야 했다. 그러나 이순이를 비롯한 그의 시어머니, 시숙모 등은 자신들의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의 남편 및 형제들과 함께 공동 정범(共同正犯)임을 선언하고 연좌율의 적용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들도 신유년 말경에(양력으로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이순이는 전주 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두 통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 편지 중 하나는 그의 어머니 권씨에게 보내는 짤막한 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친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상당히 긴 편지이다. 이순이는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처지를 전하고, 살아 지낼 친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편지에 담긴 내용
 
이순이는 이 두 통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열렬한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여기에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받아 모신 성체에 대한 짙은 신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798년 유중철과 함께 동정 서원을 한 이후 이를 지켜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형제에 대한 애틋한 우애를 드러내고 있으며 내세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현세적 고통에 대한 인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편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의 신앙과 삶은 18세기 후반기를 막 넘어선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관에 대한 결연한 거부를 표현했다. 그의 동정 생활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 삶을 뜻함과 동시에 남편에 얽매어 지내야 했던 여인네의 일반적 관행에 대한 일대 도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로써 성리학적 남녀 윤리를 거부하려 했고, 남녀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려 했다. 편지에서 나타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는 이땅에 새로운 사랑의 불을 지피려 했던 결단의 표현이기도 했다.
 
남은 말
 
‘순이’라는 이름은 순해 터진 이땅의 아낙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순한 아낙들의 강인한 삶이 우리 역사와 문화의 반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순이는 나약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만은 아니했으며, 그 굳고 질긴 믿음을 통해 이땅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해 준 인물이었다.
 
이순이의 편지는 그의 큰오빠 이경도가 1801년에 순교하기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편지 및 1827년 전주옥에서 유사한 동생 이경언의 편지 등과 함께 “발바라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중 이순이의 편지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천주교회사”(상권)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199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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