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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하우현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은 교우들의 숨결이 서린 곳
지번주소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201 
도로주소 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
전화번호 (031)426-8921
팩스번호 (031)426-8922
홈페이지 http://cafe.daum.net/love-woohyun
전자메일 hau@casuwon.or.kr
문화정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사제관)
복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 바오로는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던 가운데 한 토마스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이듬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인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타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한덕운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한덕운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1845년)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 아니체토는 1845년 9월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하였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1840-1866년)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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