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춘천교구 > 양양 성지 ·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착한 목자 순교자 이광재 신부가 사목한 영동 지역 신앙의 모태
지번주소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1 
도로주소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청길 17
전화번호 (033)671-8911
팩스번호 (033)671-8912
홈페이지 http://cafe.daum.net/jhw0623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지역 강원도 평강읍 서변리 평강 성당.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에 온 오 아녜스씨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클라라 자매 집에서 기거하며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을 돌보던 이광재 신부(1909-1950년)가 체포됐다는 것이다. 이 신부는 양양 본당 주임이었으나 1949년 4월 평강 본당 주임 백응만 다마소 신부가 공산당에 체포된 후 그해 8월부터 평강 본당까지 맡아 양양과 평강을 오가며 신자들을 사목하던 중이었다(백응만 신부는 1950년 1월 고문과 굶주림으로 옥사했다).
 
성당 옆마당에서 2009년 이광재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석상.체포된 이 신부는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사감방에 수감됐다. 특사감방은 사상범들을 수용하는 감방을 말한다. 그곳에서 이 신부는 자기보다 먼저 잡혀온 연길 베네딕도회 소속 김봉식 마오로 신부를 만났다. 비록 방은 달랐지만 두 사제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라틴어로 서로 고해성사를 주면서 형무소 생활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8일 밤 10시 “특사감방 일어나라!”는 호령에 따라 이 신부는 다른 일행과 함께 감방에서 끌려나왔다. 수감자들은 모두 팔을 뒤로 한 채 밧줄로 결박당했고, 4명이 한 조가 돼 굴비 엮이듯 줄줄이 엮여 바깥 산으로 내몰렸다. 산 중턱을 지나 커다란 웅덩이처럼 움푹 팬 곳으로 내려섰다. 소문으로 듣던 큰 방공호였다. 거기에는 이미 총살을 당해 죽은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인민군의 총알은 새 희생자들을 찾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 신부와 김 신부도 있었다. 김 신부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이 신부는 총을 맞고도 그 밤을 버텨냈다. 기적적으로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총을 맞고 즉사한 사람도 있지만 중상을 입고 목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물… 물 좀…”, “아이고… 나 좀 살려줘…” 하는 신음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와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 하는 목소리였다.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광재 신부였다고. 스무 번이 넘도록 되풀이하던 이 신부의 이런 목소리도 점차 기력을 잃더니만 마침내 조용해졌다. 1950년 10월 9일 새벽이었다. 사제 생활 만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41살로 생을 마감한 이광재 신부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한 ‘착한 목자’였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착한 목자’ 이광재 신부의 삶을 되짚어보자.
 
‘착한 목자’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 착한 목자 예수를 따르고자 사제가 된 이광재 신부는 외양간은 아니었지만 1909년 6월 9일 강원도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아버지 이만현 가브리엘과 병약한 어머니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북녘 땅이 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냉골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굶주리는 둘째 아들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광재가 5살 되던 해에 누이를 시켜 어린 동생을 저잣거리에 버리고 오라고 했다. 어린 동생을 얼러 15리 길을 걸어 장터에까지 갔지만 누이는 동생을 차마 그냥 두고 올 수 없어서 등에 업고 돌아왔다.
 
굶어 죽을까봐 두려워 자식을 버릴 작정까지 했을 정도로 가난의 극을 치달았지만 부모는 깊은 신앙심으로 2남 1녀를 키웠다. 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들어도 묵주신공은 빠짐없이 바쳤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늘 기도 속에 살았다. 광재가 사제성소를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신앙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지만 광재는 7살 되던 해에 형 광익 필립보와 함께 동네 글방에 다니며 글을 익힐 수 있었다. 형의 증언에 따르면 5년 동안 글을 배우면서 종아리 한 번 맞지 않고 글방에 다녔다. 그만큼 총명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린 광재가 언제 첫영성체를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구교우 집안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명오가 열리는 나이인 7-8살 때부터 형을 따라 포내 본당 관할 공소에 다니면서 첫영성체를 했을 것이고, 포내 본당 주임 부이수 신부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제성소에 관심을 갖게 됐을 것이다.
 
소년 광재에게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준 또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신학생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였다. 광재가 살던 냉골에서 포내 본당까지는 20리를 걸어야 했지만 광재는 한 번도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노기남 신학생에게 예사롭게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14살 때인 1923년 9월 14일 광재는 마침내 용산 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한다. 또래인 이재현 요셉과 함께였다. 돈이 없어 집에서부터 황해도 평산 남천역까지 150리를 걸어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신학교 입학생 가운데 두루마리 차림은 이광재 뿐이었다. 게다가 유난히 작은 키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휘어진 손가락 등으로 광재는 신학교에서 선배와 동료들에게 ‘촌놈’으로 불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지한 촌놈이 아니라 순박하고 깨끗한 촌놈이었다. 처음에 그를 놀렸던 신학생들도 그의 순박함과 성실함에 감화되기 시작했고, 언제가부터는 그를 ‘8품 신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 ‘7단계로 이뤄진 품’을 받아야 했는데 마지막 7품이 신품 곧 사제서품이었다. ‘8품 신부’라는 별칭에는 이미 그가 신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았을까.
 
6.25 전쟁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된 이광재 신부의 의묘가 죽림동 주교좌성당 뒤뜰 성직자 묘지에 있다.준비된 사제 ‘8품 신부’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왔다. 1935년 차부제품을 받기 전이었다. 어렸을 때 다친 손가락이 문제였다. 광재가 9살 때였다. 낫으로 버드나무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려다 왼쪽 둘째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급하게 달려온 부모는 부목을 댄 후 칡덩굴로 칭칭 감아 맸는데 다행히도 손가락이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아 마치 뱀 모양처럼 기형이 돼버렸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신학교 교수신부들은 회의를 열어 차부제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 같은 선고였다.
 
얼마 후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제병을 만지고 성체를 들어 올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신부들은 다시 차부제품을 받도록 허락했다. 이광재 신부는 이듬해인 1936년 3월 28일 종현(명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박원영 프란치스코, 임종구 바오로, 김학용 시몬 등 동기생들과 함께였다.
 
이 신부 첫 임지는 당시 정규하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풍수원 본당 보좌였다. 외모는 그다지 볼품없었고 과묵한 성품이었지만 겸손하고 열성적인 젊은 사제는 3년 조금 넘는 풍수원 보좌 생활을 통해 착한 목자 사제상을 신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순교자 이광재 신부 순교에 관한 고증록”에서 전하는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학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지불했고, 누가 알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열심한 교우가 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추운 겨울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때 어떤 거지가 성당 마당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교우들에게는 “예수님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실지 모른다”고 말했다.
 
눈 내리던 어느 날 동산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니 이 신부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당 난로에 땔 장작이었다.
 
30-40리 떨어진 산골 공소에서 저녁 늦게 병자성사를 청하러 왔는데 늦었으니 다음날 가라는 주임신부 말에 영혼을 구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며 길을 나섰고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기겁을 했으나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사제관으로 와 다음날 아침 미사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농촌에서 봄철에 논을 갈 때에도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새벽 3시에 미사를 드려주곤 했다. 누가, 언제 고해성사를 청해도 즉시 응했다. 시골 신자들이라 시간관념이 없어 아무 때나 가서 성사를 청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영혼 하나하나를 정성껏 지도해 주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 신부는 틈만 있으면 성당 성체 앞에서 지냈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서는 ‘보좌 신부님을 만나려면 성당이나 병자집이나 뒷동산 나무패는 곳에 가면 된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뼈저리게 가난을 체험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가난의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린 시절 허기를 달고 지냈을 정도로 가난하게 자란 이 신부는 그 반대였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그는 가난을 온 몸으로 포용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는 본보기를 발견했다. 가난을 ‘귀부인’이라고 부른 평화의 사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다.
 
1937년 9월 28일. 이광재 신부는 또 다른 의미 있는 행보를 시작한다. 선배인 오기선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회(3회)에 입회한 것이다. 이 신부가 추운 겨울날 거지에게 버선을 벗어주고 옷을 벗어준 것도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더욱 본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수도명으로 삼은 이 신부는 이후 평생을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삼회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닮고자 노력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이광재 신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한 것은 이런 프란치스코 정신의 발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기에.
 
1939년 7월 이 신부는 3년간의 풍수원 보좌 생활을 마치고 양양 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다. 당시 양양 본당의 현안은 성당 이전과 신축이었다. 이 신부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양양읍 성내리 8 현재 자리에 붉은 벽돌조 슬레이트 지붕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을 완공하고 1940년 2월 봉헌식을 가졌다.
 
양양 본당 주임시절인 1944년 세례식 후 새 영세자들과 함께 한 이광재 신부.이 신부는 신축 공사로 바쁜 중에도 공소 순방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관할 구역 외에도 영서 지방인 인제, 양구, 화천 지역 공소들까지 순방하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늘 걸어서 공소를 순방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신자가 나귀 한 마리를 선사했지만 이 신부는 먹이를 먹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사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양양 성당은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신부와 성당 식구들은 성당 곁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마침내 1945년 8월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으면서 이 신부와 신자들은 성당도 되찾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 성당과 이 신부는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감시 대상에 들었다. 소련군은 높은 곳에 있는 성당을 사용하고자 이 신부가 공소 순방을 나간 틈을 타 성당을 점유해 버렸다. 얼마 후 소련군은 물러났지만 다시 인민군이 들어와 성당은 물론 부속건물마저 접수했다. 이 신부는 한 적산가옥으로 쫓겨나 공산당 감시 속에 미사를 드리며 신자들을 돌봐야 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한교회는 공산당 탄압으로 차츰차츰 붕괴돼 갔다.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끌려가 살해되기도 했다.
 
양양 성당은 38선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신부는 공산당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이들을 안전하게 숨겨주었다가 본당 교우들을 통해 무사히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 일에는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따랐지만 이 신부는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월남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 하나라도 더 월남해 남한에서 하느님 영광을 한껏 드러내도록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신부는 남아 있는 신자들을 찾아 돌보는 사제 본연의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사목자들은 1년이면 절반은 공소 순방에 할애하곤 했는데 이 신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환자를 방문해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임종을 지켜주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 신부였다.
 
1949년 1월 15일 70살이 넘은 병약한 노모 김 수산나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 공소를 순방 중이던 이 신부는 어머니가 선종한 다음날 돌아와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뉘우치며 대성통곡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을 기다리는 공소 신자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해야 한다며 장례일을 모두 식복사에게 떠맡기고는 떠났다. 이 신부는 그런 사제였다. 그 참 마음은 하느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다.
 
이북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1949년이 되자 공산당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해 4월 평강 본당 주임 백응만 신부가 공산당에 체포되자 이 신부는 백 신부를 대신해 평강과 원산 등지를 다니며 은밀하게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1950년 4월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자 양양 본당에 돌아와 지내던 이 신부는 그해 6월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평강과 원산 지역 신자들을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던 주일 새벽에 이 신부는 결국 체포됐고 원산 형무소에 수감됐다.
 
한편 춘천교구는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기를 맞아 2000년 10월 8일 추모 미사를 봉헌했으며, 다음날인 9일에는 교구 사제단 70여 명이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현재 양양 성당에는 이광재 신부 기념관과 순교 기념비 및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출처 :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 6월 6일, 이창훈 기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