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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요당리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내포지방과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의 교두보
지번주소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 
도로주소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전화번호 (031)353-9725
팩스번호 (031)353-9785
홈페이지 http://www.yodangshrine.kr
전자메일 yodang-hl@casuwon.or.kr
요당리 성지에는 다음과 같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얼이 서려 있습니다.
 
첫째,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과 125위 시복추진자인 장 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이곳 출신 순교자로서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홍원여(가롤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장주기(요셉) 성인의 친인척이자 이곳 출신 순교자로 추정되는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 요한, 장 요셉의 숙모 방씨 등이 있습니다.
 
둘째, 교회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하신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맡으며 신앙전파에 힘쓰다 순교하신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께서 활동하셨던 곳입니다.
 
셋째,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셨다가 순교하신 앵베르 범(라우렌시오, 1796-1839) 성인과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하신 손경서(안드레아, 1799-1839)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1803-1866년)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회장(1787-1840년)
 
성 민극가 스테파노(Stephanus)는 인천의 어느 외교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바르고도 냉정한 판단력을 소유했던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들어와서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20세에 이르러 어느 교우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곧 상처하였다.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재혼하였지만, 딸 하나를 두고 아내가 세상을 떴으며 그 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테파노는 이리저리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는 종교서적을 베껴주고 받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니, 신부들은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평가하여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또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민 회장은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다. 포장이 “이 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마.” 하자 그는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하여 회두시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치도곤을 매우 치게 하면서 “이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 사정없이 쳐라”고 소리질렀다. 이리하여 그는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옥중에서도 스테파노는 형벌로 인한 상처를 못 이겨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목숨을 아까워하여 가족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권면하였는데, 그의 노력이 눈에 띄게 효과를 내어 약한 신자 여러 사람이 배교를 철회하고 통회하였다고 한다. 이 이튿날도 그는 곤장 40대를 맞았지만 처음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민 스테파노는 옥에 갇힌 지 5, 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정화경(鄭- -) 안드레아 회장(1807-1840년)
 
성 정화경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정산 고을에 사는 부유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성이 순박하고 양순한 반면에 머리가 둔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천주교 봉행을 방해하자 고향을 떠나 여러 번 이사를 하며 피난처를 마련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대단히 순박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 안드레아는 교회 일에 참여할 나이가 되자 자주 서울을 오가며 자기 힘자라는 대로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기 때문에 교회 상황과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근황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3명의 서양인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배교자 김여상은 필요한 인원만 주면 자기가 그들을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하고는 지방으로 내려가 옛날 친구였던 자들을 찾아가 헛소문을 다음과 같이 퍼뜨렸다. “서울에서는 똑똑한 교형들이 대관들 앞에서 성교회의 진리를 폈소. 천주의 은혜로 관장과 대신들까지도 눈을 떠서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적당히 설명해 주기만 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 있소. 자유의 때가 드디어 이르렀소. 그리고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온 조정이 분명히 천주교에 들어 올 것이오.”

이 말에 속아 넘어간 신입 교우들은 정 안드레아가 주교님의 처소를 알 것이라고 말하였고, 김여상은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도 똑같은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춤을 출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궁리하고 나서 자기 혼자 소식을 알아보러 가겠다고 말하여 그는 김여상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정 안드레아가 주교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앵베르 주교는 “내 아들아, 너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미 배교자가 문 앞에 와 있다는 것과 이제 도망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수하였다.

주교가 붙잡힌 뒤에도 정 안드레아는 멀지 않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는 포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 몇몇 교우들의 집을 가르쳐 주어 그 신자들도 붙잡히게 되었다. 포교들은 또다시 그를 이용하여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찾아내려 하였으나, 아무리 바보 같았던 그도 마침내 원수들의 모략을 간파하여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들을 비밀리에 찾아보고 위험이 신변에 박두했다는 것을 일러주었으며, 고해성사를 받고 스스로 나아가 자수하겠다고 하였으나 신부들이 말렸기 때문에 몸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다.

그 후 정 안드레아는 배교자 김여상의 눈에 띄게 되어 1839년 7월에 포교들에게 잡혔다. 정 안드레아는 주리를 틀리고, 대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았으며, 100대의 치도곤, 매질 등의 형벌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다섯 달 동안 옥에 갇혀 괴로운 형벌과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1840년 1월 23일에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액스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장 토마스(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장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장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장 토마스는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장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장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양간 출신의 순교자
 
1) 지 타대오 순교자(1819 ~ 1869. 5. 23)
양간 용소말(현재의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출신으로 안중 공소의 인광리(현재의 평택시 현덕면 인광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 체포되어 1차 배교 후 석방되었으나, 이를 후회하고 순교를 다짐하던 중 1869년에는 피신하라는 주위 권고를 만류하고 포졸들에게 잡혀가서 진위 감옥에 수감, 그곳에서 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수원으로 이송되어 화성 북문 밖에서 1869년 5월 23일 공개 처형을 당했다.

2) 림 베드로 순교자(? ~ 병인박해기) 
양간 용소말 출신으로 양지 고을 응다라니에 거주하던 중에, 정 안드레아, 림 요한, 림 안토니오, 이중화 등 총 12명의 교우가 함께 피체되어 수원으로 이송되었고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3) 조명오 베드로 순교자(1823 ~ 1872. 4)
양간 출신으로 1872년 3월 26일에 체포되어 서울 우포청에서 순교했다. (또는 1871년 4월 홍원여와 함께 우포청에서 순교했다고도 전한다.)

4) 홍원여 가롤로 순교자(1849 ~ 1871. 4)
양간 출신으로 1871년 23세로 경포에게 체포되어 그해 4월 서울 우포청에서 조명오와 함께 순교했다.
 
 
타지 출신으로 양간에서 활동한 순교자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1799~1839.12.21)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유방제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1838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을 때 거짓으로 배교하고 돈을 주어 풀려났다. 1839년 처남인 정화경 안드레아와 함께 앵베르 주교를 양간(상게)로 은신시켰다.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 후 가족들이 체포되자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1839년 12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양간 출신 가능성이 있으나 그 여부가 불명확한 순교자
 
아래의 다섯 순교자는 장주기 요셉의 친척으로 장주기 성인과 그의 육촌으로 순교자인 장 토마스 등이 수원 고을의 양간 느지지 출신인 점으로 보아 이들도 양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기록에 명시된 바가 없으므로 향후 좀 더 세밀한 고찰을 요한다.
 
1) 장경언(? ~ 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병인박해기 서울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2) 장치선(? ~ 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조카로 병인박해기에 포청옥(?)에서 5명의 가족이 함께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3) 장한여(? ~ 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종(6촌). 병인박해기에 부인 홍씨와 함께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4) 장 요한(? ~ 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아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해서 순교하였다.

5) 장 요셉의 숙모(방씨) (? ~ 1869)
성 장주기 요셉의 숙모로 성은 방씨이며 장순성의 모친이다. 1869년 서울 우포청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이상 요당리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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