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알렉산데르는 250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베드로(Petrus, 11월 25일)와 그의 후임자인 복자 아킬레오(Achilleus, 6월 13일) 총대주교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자로 추정되며, 312년 착좌 1년 만에 선종한 복자 아킬레오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에 멜레티우스 이교(Meletian schism)와 아리우스주의(Arianism) 이단자들에 맞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권위와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데 헌신하였다. 아리우스는 성 베드로 총대주교 재임 중에 멜레티우스의 엄격주의에 동조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복자 아킬레오 총대주교 때 사제품을 받았다. 성 알렉산데르 재임 초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6년 정도 후에 교의적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다. 성 알렉산데르는 온유함과 자부적인 권고로 아리우스의 주장이 가톨릭교회의 전통 교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의 주장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도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불응하며 계속해서 잘못된 교리를 퍼뜨리자 318년 또는 320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우스주의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와 추종자들을 파문에 처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이 결정마저 불복하고 팔레스티나로 피신하여 다른 주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잘못된 사상을 계속해서 퍼뜨렸다.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분열의 아픔을 겪자 성 알렉산데르는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I, 12월 31일)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교황은 코르도바(Cordova)의 주교를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 6월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공의회에서 당시 부제였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가 성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를 도와 아리우스에 대한 공식적인 파문 결정을 받아냈다. 공의회가 폐막된 후 성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는 교부들의 서명이 있는 편지를 가지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고, 선종하기 전에 성 아타나시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성 알렉산데르의 선종 날짜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으나 326년 또는 328년의 여러 날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에서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26일 목록에서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던 연로한 나이의 성 알렉산데르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어 이단적 교리를 퍼뜨린 아리우스를 추방하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를 단죄한 교부 중 한 명이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신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제였던 성 알렉산데르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후 이단적 사상에 빠진 사제 아리우스를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318명의 교부들과 함께 아리우스를 단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선종 시기는 326년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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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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