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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 관덕정 순교 기념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순교자들의 순교터에 세워진 도심 속 순교 기념관
지번주소 대구시 중구 남산 2동 938-19 
도로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관덕정길 11
전화번호 (053)254-0151
팩스번호 (053)253-0666
홈페이지 http://www.daegusaint.org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16-1867년)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765?-1815년)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에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문초하던 관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이내 감사는, 그녀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고, 그녀는 막 감영의 대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김 안드레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힘써 권면하였다. 


김 안드레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 아가타 막달레나의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놀란 관장이 ‘방금 나갔는데, 왜 다시 들어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은 화가 나서 미친년으로 몰아 내쫓게 하였다. 그러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시 들어와서 이전의 배교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하였고, 관장은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살점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내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끌려갔는데, 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음력 4월 말, 또는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1783-1816년)


일명 ‘시회’ 혹은 ‘시우재’라고 하는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는 1783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을 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 알렉시오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이곳저곳으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김 알렉시오는, 고향을 떠나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에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포졸들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울면서 말하였고,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안동으로 끌려간 김 알렉시오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가 보여준 굳건한 신심은 형리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려는 노력까지 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알렉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시 한 번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김 알렉시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그의 턱을 부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옥으로 돌려보냈다. 


“김시우는 스스로 천주교의 소굴이 되어 늘 교리를 전하고 익혔으며, 십계는 물론 남들이 외우지 못하는 『칠극』이나 묵주 기도 등도 외우고 있다. 그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교회 서적을 감추어 둔 곳에 대해서는 단지 그 지명만을 이야기할 뿐이고, 누구에게 서적을 나누어 주었는지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진술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김 알렉시오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는데,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때였다. 


이후 오랫동안, 조선 신자들 사이에서는 김시우 알렉시오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또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시우 알렉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최봉한 프란치스코(1785?-1815년)


‘여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진강’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 안드레아와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최 프란치스코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간 최 프란치스코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알렉시오, 최필공 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가운데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누이를 정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최 프란치스코는 가족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에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그는 동료들에게 ‘문초를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라.’고 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최 프란치스코는 장모인 구 바르바라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형벌 가운데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구로 이송된 최 프란치스코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정신을 잃기도 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용기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 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다. 또 그가 순교한 시기는 1815년 음력 5월경이었다.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순교하기 전에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봉한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해 가지고 경상도 산골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마을을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니, 지극히 엄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서석봉 안드레아(?-1816년)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 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뒷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서 안드레아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부였던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서 안드레아는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진영에서는 서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경주 관장은 그를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대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 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서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에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대구 감사가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뉘우칠 줄을 모른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서석봉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1765-1816년)


교우들 사이에서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김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아버지가 1801년에 순교하자, 김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김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김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나섰다.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김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 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 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구성열 바르바라(1776?-1816년)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는 본디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그녀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구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구 바르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이를 용감하게 이겨 냈다. 


경주로 압송되자마자 구 바르바라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마음이 약해졌고, 옥으로 돌아와서는 배교할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그녀의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권면 덕택에 구성열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고 어떠한 형벌도 꿋꿋이 참아 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구 바르바라는 남편과 사위, 그리고 신앙을 고수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또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고,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아픔이 있었음에도 구성열 바르바라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 내었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약 40세가량이었다. 


구 바르바라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구성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시임 안나(1782-1816년)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이 안나의 부친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를 다닐 때면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가족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성이 박씨(朴氏)인 한 교우 뱃사공이 이 안나를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 되어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린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하였다. 


과부가 된 다음에도 이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겪게 되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 안나는 먼저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저희를 부르시면서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시임 안나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시임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고성대 베드로(?-1816년)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고 베드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제인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그해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고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고성대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고성운 요셉(?-1816년)


‘성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운(高聖云)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고 요셉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또한 고 요셉과 고 베드로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온 줄로 알고는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세었던 고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였다. 그러나 이내 신자들은 그들이 도적이 아니라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모든 저항을 멈추었고, 고 요셉은 어린양처럼 양순해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고 요셉은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고성운 요셉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고성운 요셉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화춘 야고보(?-1816년)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김 야고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이 되고자 애썼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언제나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경주 포졸들이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하고 다닐 때, 김 야고보도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이 제시한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혹독한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대구에서 여러 달을 갇혀 지내는 동안, 김 야고보는 여러 차례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감사도 마침내 그의 신앙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게 내려진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김화춘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워 대대로 죄악을 저질러 왔다.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천주교 교리를) 귀로 전해 듣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사악한 말을 깊이 믿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함이 아주 지극하다.” 


김화춘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야고보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화춘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박 바오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박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에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인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박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가 여러 차례의 형벌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그런 다음 박경화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화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세박 암브로시오(1761-1828년)


‘군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에서 태어나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관명(冠名)은 ‘언우’였고,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김 암브로시오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가족은 이를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심하게 방해하였고, 천주교를 욕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김 암브로시오는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김 암브로시오는 가끔 산중으로 들어가 살면서 신심을 함양하는 데 열중하곤 하였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겨 하였고, 식생활을 절제하는 데 힘썼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 암브로시오는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이내 그는 안동 관장 앞으로 끌려가,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는 추궁을 받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뒤, 김 암브로시오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때때로 그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백절불굴의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이후 감사는 그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적어 형조로 올려 보냈다. 


“김세박은 자수해 와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습니다.” 


결국 김 암브로시오는 자신의 사형 선고문을 서명을 하고 처형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는 음식을 완전히 끊기로 작정하고 철저하게 금식재를 지켰다. 자신이 먹는 음식이 인근의 주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있는 동료들이 똑같이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하자, 김 암브로시오는 ‘그것은 자살 행위가 된다.’고 하면서 음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형벌과 금식재로 쇠약해진 탓에 끝까지 옥중 생활을 이겨 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사망하자 교우들이 모두 이를 애석해하였고, 그의 거룩한 생애와 영광스러운 종말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1774-1835년)


1774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본디 명랑한 데다가 겸손하고 친절하였던 안 리카르도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하였고,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생활하였다. 또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보통 일주일에 세 번씩은 금식재를 지켰다. 


언제인가 안 리카르도는 포졸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모호한 말로 대답하여 석방되었고, 이후로는 언제나 그때 분명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 것과 용기가 부족하였던 것을 후회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 리카르도는, 언젠가는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포졸들이 마침내 그곳을 찾아내서 그를 체포하였다. 


상주 관장은 안 리카르도를 보자마자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외워 보라고 하자, 그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외우고서는 간단하면서도 명백하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 관장이, “국법을 어기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는 우주의 큰 임금이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우리는 그분을 만물 위에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이어 관장은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안 리카르도는 이를 거절하고 형벌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언제나 끈기 있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대구로 이송토록 하였다. 


안군심 리카르도는 대구 감영에 도착한 뒤에도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천주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지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안군심 암브로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년)


‘종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디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에서 은거해 살았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이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주 가난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인내심과 박애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가족들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의 기도와 독서 생활, 부지런함과 덕행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안드레아는 가족을 모아 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격려하였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포졸들이 쳐들어오자 그는 기꺼이 그들을 따라 안동으로 끌려갔다. 


안동 관장은 이 안드레아가 끌려오자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뒤,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한 목소리로 이를 거부하고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사람을 기르시는 가장 높은 아버지이십니다. 착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것을 벌하시는 이도 그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흠숭해야 할 본분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저도 그분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이 안드레아는 대구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굳은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사가 여러 차례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지만, 그는 결코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재행은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죽기로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 안드레아와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재행 안드레아는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가 보여 준 모범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 안드레아의 나이는 63세였다. 이후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재행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박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사의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1794-1839년)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아버지였다. 


본디 김 안드레아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이 피신해 다닌 곳은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였다. 그러다가 김 안드레아는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여기면서 가끔 당시의 일을 후회하곤 하였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많은 시간을 바치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 주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러면서 김 안드레아는 다시 순교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체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천주의 섭리를 잘 따르고자 많은 기도를 드렸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왔고, 그는 이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을 밀고하라.’는 관장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천주교의 주요 교리와 십계명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며칠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의 수부인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그는 전주로 이송되어 포졸들이 교우들에게서 빼앗은 성물에 대해 답변을 한 다음, 다시 대구로 끌려오게 되었다. 


대구 옥에는 형벌을 이겨 낸 많은 교우들이 김 안드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었고, ‘그 묘미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김사건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사건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신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 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에 앞서 대구 포졸들은 신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하였다. 또한 여러 날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신 마르코가 돌아올 만한 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김해 가산이라는 곳에서 신 마르코를 만나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다음, 곧장 체포하여 밀양으로 압송하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신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쫓았다. 그들 일행을 만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수작을 하며, 신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신 마르코는 대구로 가는 동안 더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다시 신 마르코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하였으니,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후 신석복 마르코의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신석복 마르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년)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에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8년의 박해 때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박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박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대구 감사는 결국 박 빅토리노와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박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박대식 빅토리노의 나이는 56세였다.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명분으로 그들의 머리를 높이 매달게 하였다. 한편, 박 빅토리노의 가족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대식 빅토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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