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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남한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안식처
지번주소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357 
도로주소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155번길 38-13
전화번호 (031)633-9531
팩스번호 (031)634-9530
홈페이지 http://www.dannae.or.kr
전자메일 dannae-hl@casuwon.or.kr
정은 바오로(鄭溵, 1804-1866년)와 정양묵 베드로(鄭亮默, 1820-2866년)

정은 바오로는 신유박해가 끝난 지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났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사촌형(이기양, 정섭, 정옥)들이 유배되거나 사망한 터였으므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하였습니다. 성장한 뒤 자신의 등창을 치료해 주던 조사옥이라는 의원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가 입교한 뒤 모친인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정은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생활하던 중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 신자로 고발되었고 음력 11월 13일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힙니다. 정은 바오로는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 하시며 태연히 떠나셨다고 합니다. 정은 바오로가 잡혀가시자 재종손인 정양묵 베드로도 “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 하며 스스로 광주 영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12월 8일 여러 교우와 함께 백지사(白紙死 : 죄인의 손을 뒤로 묵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서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데에는 주로 매로 때려죽이는 장살(杖殺), 칼로 목을 베 죽이는 참형(斬刑), 목을 매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등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에는 너무 많은 천주교인을 잡아 죽이게 되므로, 포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진저리를 내게 되어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가 유행하였었다. 곧, 사람을 죽이는데 염증을 느낀 포청의 형졸들이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백지사였던 것이다.)로 순교합니다. 이렇게 순교한 교우들의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東門) 밖 개울가에 버렸는데, 수십일 혹은 수개월 동안 버려져 있었기에 많이 상한 시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은 바오로가 광주 영문에 잡혀가시자마자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포졸들은 남아있는 식구를 잡으려고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결국, 남은 식구들은 눈 덮인 산으로 피신해, ‘검은바위’나 ‘옥시울 양지골’, 그리고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장소인 ‘굴바위’에서 은신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년놈들을 내쫓든지 아니면 모두 잡혀가 몰살을 하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동네가 시끄러워서 살 수 있나. 그 년놈들을 집에다 숨겨주고 밥을 주는 놈이 누구냐? 그놈부터 내쫓아야겠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은 바오로가 치명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일동 방지거와 수동 필립보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버려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매부 박서방의 8촌 박선여에게 부탁을 합니다. 생사(生死)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이기에 고민 끝에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박선여는 낮에 동문 밖으로 갑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바위 밑에 굴러 떨어져 있는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풀을 베어 덮고 큰 돌로 표시를 해 둡니다. 밤이 되어 아들 둘은 낮에 표시해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들쳐 메고 이곳 단내에 와 산소에 모셨습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고향 단내를 떠나 30여 년을 산속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00년이 되어서야 다시 고향 단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함께 치명하셨던 정양묵 베드로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해 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남한산성 동문 밖 흙을 거둬 정은 바오로 산소 옆에 모셨습니다.

성가정 성지에는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소와 정은 바오로 가족들이 숨어 지내던 ‘검은바위’, ‘옥시울 양지골’, ‘굴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어 순례길을 따라 과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피신처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 ‘정양묵 베드로’는 ‘정 베드로’라고만 알려져 있었을 뿐 그 이름을 알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성가정 성지 전담 신부(이정철 바오로)가 ‘광주부유영장계등록(廣州府留營狀啓謄錄)’과 ‘동래정씨창원공파보(東萊鄭氏昌原公派譜)’의 비교 연구를 통해 146년만인 2012년 봄에 정 베드로의 이름이 양묵(亮默)임을 밝혀냈다.

* 순교일에 관하여도 날짜의 혼동이 있어왔다. ‘검은바위(정운택 안드레아 신부, 유림문화사, 초판1977/1999, p20-22.)’에는 잡히신 날짜가 “1866년 12월 2일(음력 11월 3일)”이며 순교일이 “12월 27일(음력 12월 3일)”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나와 있는 양력과 음력이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순교자 윤유일, 정은 평전(하성래, 황석두루가서원, 1988, p286.)’에는 잡히신 날짜가 “1866년 11월 13일”에 순교일이 “12월 8일(양력 12월 27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는다. 또한, 정운택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엮으신 ‘검은바위’의 날짜와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형옥과 천주교 신자들의 옥살이(교회사학, 원재연, 수원교회사연구소, 2004, p263)’에는 순교일이 12월 18일로 나와 있다. 이는 앞서 나온 ‘검은 바위’와 ‘순교자 윤유일, 정은 평전’과도 맞지 않는 날짜이다. 게다가 성가정 성지에 있는 십자가 비석도 순교일이 12월 27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쓰여진 정규량 레오 신부님(1882-1952)의 ‘단내정씨가사’에도 잡히신 날짜가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2일)로 나오며 이 또한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순교일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12월 18일(양력 12월 27일)로 두 번째는 음력 12월 8일로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교일도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자면 일단 양력 1866년 12월 27일은 음력으로 11월 21일이 된다. 그러나 이 날짜는 원사료(原史料)인 ‘단내정씨가사’에 나온 날짜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력 12월 27일은 잘못된 날짜이다. 다음으로 원사료인 ‘단내정씨가사’에서 서로 다른 두 날짜(음력 12월 18일과 12월 8일)가 나오는데 내용 중 잡히신 지 25일 만에 순교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잡히신 날짜가 음력 11월 13일이므로 순교일은 음력 12월 18일이 아닌 12월 8일이 맞는 날짜다. [출처 : 단내 성지 홈페이지]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1809-1840년)
 
성 이문우 요한(Joannes)은 경기도 이천 동산 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에 태어났으며 경천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5살 때에 고아가 되어 어떤 여신자가 서울로 데려가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그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비록 그는 독신생활을 소원하였으나 양모의 원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결혼하는데 동의하였고 가장으로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을 실천하는데 전념하며 신자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할 따름이었다.
 
요한은 1년 이상 모방(Manbant, 羅)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의 일을 했고, 1839년의 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이곳저곳으로 찾아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차례 알려드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이름이 알려져 있어 체포될 위험이 많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요한은 7명의 신자와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고 성직자들의 시체를 찾아 노고산에 모신 다음에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붙잡혔다. 처음에는 그 역시 한동안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오라를 받고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장의 온갖 회유와 계략적이 말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죽음을 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대군대부를 배반해야 할 것인데, 죽어야 한다 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관장님이 말씀하신 바는 모두 오래 전에 생각한 것이오니, 더 이상 강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술과 음식을 주는 등 또다시 여러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으므로 도둑들이 갇혀 있는 감방으로 들여보냈다. 요한은 도둑들의 감방에서 지냈는데 그들 중에는 배교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불쌍한 사람들이 전에는 어쩌면 나보다 더 착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멸망하지 않았는가! 천주여, 제 마음 약함을 도와주소서.”
 
이윽고 형조로 이송된 요한은 그곳에서도 굳센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마침 그곳에 있던 12명의 용감한 형제자매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호영(李~) 베드로(1802-1838년)
 
성 이호영 베드로(Petrus)는 경기도 이천 땅 구월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 모친과 누이 아가타(Agatha)와 함께 서울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 때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그의 충실성을 보고 아직 젊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었고, 여러 교우와 외교인을 항상 권면하여 자기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하루는 과거 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의 총신과 아는 사이가 되어 급제를 하게 된 꿈을 생각하며 순교를 예감하였다고 한다.
 
1835년 2월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누이 아가타는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는 수없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 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래서 이호영 베드로는 사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나는 칼 밑에 치명하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천주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4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아냈고, 항상 대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양순한 표양이 외면에 드러나 옥졸들조차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순교하니, 때는 1838년 11월 25일, 그의 나이는 36세 때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이조이(李召史) 아가타(1784-1839년)
 
성녀 이조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의 구월에서 태어났고, 1838년에 순교한 이호영 베드로(Petrus)의 누님이다. 그녀는 17세의 나이로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여 3년을 살다가 남편과 사별했는데, 현석문 카롤루스는 기해일기에서 아가타의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얼마 아니 되는 가산마저 없이 한 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과 함께 근근이 살았는데, 그때에 그녀가 당한 고난은 필설로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곤궁 중에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아니 하였으니. 그녀의 착하고 아름다운 언행을 모두 기록하기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1835년 2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아가타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서 그녀의 올케마저 잡아가려 하자,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두시오” 하고 말하여 올케만은 어린애들과 노모를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판관 앞에 불려나간 이 아가타는 모진 매를 맞고 주리를 틀리었으나, 조금도 겁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3년 남짓 오랜 옥고를 치른 끝에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39년 5월 24일, 그녀는 여덟 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달구지에 태워져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향했다. 아가타는 우마차 위에서도 다른 때와 같이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고, 우마차에서 내리면서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1782-1839년)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명문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6세에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남동생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도 자연히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부터 예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신앙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또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양지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강당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조 바르바라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과연 이것은 빈 말이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때는 기해박해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고, 바르바라는 혼자 있다가 7월 붙잡혔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피신처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가서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더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둘러싼 신자들을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1780-1839년)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양반집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1800년경에 입교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남필용은 1801년에 고발되어 옥에 갇혔다가 유배지인 강진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20세가량이던 세바스티아누스는 경상도 단성 땅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어느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세례성사도 받지 아니하였고,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외우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를 낳기 위하여 첩까지 얻었으나 그것이 중죄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40세에 이르러 병을 앓던 중 어떤 신자의 이야기를 듣고 첩을 멀리하고 성세를 받은 후로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교리를 알고 회개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허송세월한 것을 회복하려고 애쓰니,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가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여 온 다음, 유 신부의 심부름으로 북경에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신부 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세바스티아누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 고을에 몸을 숨겼으나 어떤 신자가 포청과 내통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장은 주리를 클게 하며 세바스티아누스에게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확고부동하였다. 이 이튿날 의금부에 이송되어 문초를 세 번 당하는 동안 다리에 곤장을 수없이 맞았고 참수의 선고를 받았다. 남 세바스티아누스는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여자 옥의 옥리를 불러 자기와 같이 붙잡혀 아직 옥에 남아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언약했는데 천주께서 달리 안배하시니 적어도 둘이 다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 천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일러 보냈다. 그 후 세바스티아누스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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