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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신앙 고백

교회 교리서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제 2 장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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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전하다”(에페 3,8)

425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달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그분을 알리는 것이다. 그분의 첫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알리려는 열정에 불탔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그리고 그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렸던 친교의 기쁨에 초대한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1-4).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

475 마찬가지로, 교회는 681년 제6차 세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의지와 두 작용을 지니신다고 고백하였다. 그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이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은 성부께 완전히 복종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성부성령과 함께 하느님으로서 결정하신 모든 것을 인간으로서도 원하신다.(114) “그리스도의 인간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115)

원죄 없으신 잉태

490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137) 가브리엘 천사는 잉태를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고(138) 인사한다. 사실 마리아신앙으로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예고에 자유로이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은총으로 인도되어야만 했다.
491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139)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구원받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140)
492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나자렛의 동정녀를 꾸며 준 더없이 뛰어난 성덕의 빛은”(141)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보아 뛰어난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셨다.”(142) 성부께서는 다른 모든 창조된 인간들보다 마리아에게 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493 동방 전통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전히 거룩한 이”(Panagia)라고 불렀으며,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이를테면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시다.”(143) 하고 찬미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친교

519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요, 모든 사람의 재산이다.”(20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202) 강생에서부터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로마 4,25) 부활하시기까지 당신 일생을 사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1요한 2,1), “늘 살아 계시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히브 7,25). 그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고통 받으신 그 모든 것을 지니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히브 9,24) 계신다.
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203) 그분은, 당신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완전한 인간(204) 이시다.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으며,(205) 몸소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고,(206)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가난박해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207)
521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208)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범으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사신 삶에 우리를 당신 몸의 지체로서 참여하게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실존과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지속시키고 성취해야 합니다.……그 신비들이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온 교회에 그 신비들을 나누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이 일은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려는 만큼 효과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그 신비들을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고자 합니다.(209)

성탄의 신비

525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가난가정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다.(219) 순박한 목동들이 이 사건의 첫 증인들이다.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220) 교회는 이날 밤의 영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동정녀 오늘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221)
526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222)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223)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224)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나고”,(225) “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 한다. 성탄신비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226)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 성탄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이다.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영혼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관여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도다.(227)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

538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계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머무르신다.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263) 이 시기가 끝 날 무렵, 사탄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자세를 변질시키려고 세 번 유혹을 시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서 아담이 받은 유혹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이 집약된 공격을 물리치신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예수님을 떠나간다.
539 복음사가들은 이 신비한 사건이 지닌 구원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첫 아담유혹에 넘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꿋꿋하게 서 계시는 새 아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전하게 수행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대들었던 사람들과는(264)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악마를 이기셨으며, 그의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시고자 “힘센 자를 묶어 놓으셨다.”(265)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자를 물리치신 것은 당신의 수난, 곧 아버지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으로 바친 최고의 순종을 통한 승리의 예고이다.
540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아이신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그분께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266)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유혹자를 이기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교회는 해마다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광야예수신비와 결합한다.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597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복합성을 고려할 때,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아시겠지만 그 주역들(배반자 유다, 최고 의회, 빌라도)의 개인적 죄가 어떠하든, 선동을 받은 군중들의 외침이나(430) 성령 강림 뒤의 회개하라는 호소에 포함된 일반적인 책망이 있었다 해도,(431) 그 재판의 책임을 예루살렘유다인 전체에게 지울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심으로써,(432) 예루살렘유다인들과 나아가 그 지도자들의 “무지”를 인정하셨고,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도 그렇게 하였다.(433) 나아가 책임 인정의(434) 표현인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하는 군중의 외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다른 유다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확대할 수는 없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435)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601 “의로운 종”의(444)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은 보편적인 속량, 곧 사람들을 죄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속량신비로서(445) 성경에 예고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해 받았다.”고(446) 말하는 신앙 고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는 것을 고백한다.(447) 속량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특히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448)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고난 받는 종에 비추어(449) 당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시하셨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 주셨고,(450) 다음으로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셨다.(45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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