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신해서 사제의 성사집행 선언으로 세례 받은 후에 범한 죄를 참회할 때 그 죄를 사해주는 성사가 고해성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해성사는 세례의 재생과 쇄신이라는 관점에서 세례 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고해성사를 구원의 두 번째 가능성이 있는 성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Trent공의회). 그리고 고해성사의 설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으로 구세주 예수께서는 사도와 그 후계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어서 죄인에게 은총을 회복하여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도록 하셨습니다(고해성사 예식서 1-2항).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발현하셔서 그들에게 입김을 부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을 거쳐 초대교회로, 초대교회에서는 그 후계자인 주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고해성사를 제정하신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1. 예언자들의 설교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에 항상 충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회개로 초대하시고 사랑의 기쁨을 나누려고 하셨습니다(호세1-3; 아모 9, 11-15;이사 26-27).
2. 죄의 고백 -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려면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죄의 고백은 곧바로 구원의 효과를 가져 오고 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여겨 왔습니다. 따라서 죄의 고백이란 인간이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는 표지가 되는 것(이사 38, 17; 시편 32, 1-7)으로 이스라엘이 죄를 고백함은 곧, 구원과 죄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신약성서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 곧 복음은 참회의 요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참회는 실제로 생활의 변화를 의미하고 나가서는 마음의 깊은 변화가 요구되는데,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는 참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마르 1, 15 ; 1,4). 이처럼 신약의 참회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새 생활, 부활하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로마 5, 27).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 후 그리스도와 일치하지만 인간의 나약함으로 죄를 허다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끊임없이 악과 맞서고 회개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1베드 4, 8;Ⅰ요한 1, 1-2; 마태 5, 5, 26).
고해성사는 역사상 매우 상이한 형태를 띠며 발전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사를 세세히 규정하시지 않으시고 환경과 필요에 따라 여러 형태를 이룩하도록 교회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고해성사는 아주 드물게 거행되었고 조건도 매우 엄격했었습니다. 첫 6세기 동안은 간음, 배교, 살인의 중죄는 교회와 화해의 가능성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화해를 하더라도 무거운 보속을 지웠고 이 세 가지 중죄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전통을 유지했었습니다.
또한, 화해 과정에서도 공개적으로 보속을 하는 ’참회자’로 구별되어 성체성사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공개보속 후에 사죄는 성목요일 날 허락되어 다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예식은 각 참회자에게 일생에 한 번 만 베풀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같은 화해 예식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점차 줄어들어 실제로 준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죄를 범한 후에는 고해하지 않고 죽기 전에 성사를 보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7세기 후반으로부터 10세기까지 참회실천에 큰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공동고해가 아일랜드식 고해형식인 개별고해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고해성사는 반복해서 받게 되었습니다. 즉, 전에는 일생에 한번 받던 성사를 이제는 여러 번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보속도 공적으로 하지 않고 사죄 후에 개인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근대적 고해성사 형식은 비단 중죄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그리스도교 근본 진리를 재천명한 것입니다.
11세기에는 현대의 고해성사 양식은 반복 가능성과 함께 사적 고해성사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1215년) ’크게 범죄한 신자는 1년 안에 사적 고해를 해야 한다.’ 고 지적하고 있고, 이 내용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오늘날의 고해성사 형식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식적 변천에도 고해성사의 근본 개념인 하느님과 교회의 일치를 회복한다는 점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죄로 인한 상처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회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치유도 가지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못 받게 되었던 사람은 고해성사로 잃었던 생명을 회복합니다. 또한 소죄에 떨어진 사람은 고해성사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써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소죄를 위해서도 고해성사를 자주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거나 심리적 수련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려는 노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2코린 4, 10). 고해성사는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해방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갈라 4, 31),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영적 제물로 자기를 바치는 행위입니다(고해성사 예식서 7항).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알아내는 성찰과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진실한 통회와,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정개와,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것과, 사제가 정해주는 기도, 혹은 선행 등을 실천하는 보속, 이상 5가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실한 통회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통회가 수반되지 않고는 고해 성사는 한갓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 통회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통회가 고해자의 행위 중에서 으뜸을 차지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통회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죄에 대해 아파함과 저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에 필요한 통회는 진실한 통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면적인 통회는 성사의 유효성, 효력을 낼 수 없는 것으로 내적인 통회가 수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동기에서 최고선인 하느님께 자기가 끼친 가장 큰 악으로서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아파하고 저주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고 또한 죄를 최대의 악으로 미워하고 피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통회가 성사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사는 외적인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마음이나 정신적으로 이룬 참회의 모습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통회는 죄의 고해와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2) 고해
고해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사제에게 자기의 죄를 자신이 고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대리자로서 이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해가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희망으로 외적으로 그분의 무한한 자비함에 의탁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성사를 위해서 고의로 죄를 감추고 불완전한 고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찰을 마친 후 죄에 대한 횟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고해하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서 죄의 비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해자는 그 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고해하고, 확실하지 않은 경우는 대충의 수를 고해하면 됩니다.
3) 보속
고해성사에서 보속은 여타의 죄의 사함, 잠벌의 사함을 얻기 위해서 사제가 정해준 일종의 영신적인 형벌 행위입니다. 보속은 고해성사의 완전성의 한 부분이 됩니다. 또한, 이 행위로써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래의 죄에 대해서 보호해 주고 나머지 죄를 치료하게 됩니다.
또한, 고해자가 정신적 나약성 때문에 보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는 고해신부가 대신 이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대리 보속이라고 합니다.
세례 후 대죄에 떨어진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고해성사를 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계명 외에도 자신과 교회에 대한 사랑에서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트리엔트 공의회). 따라서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법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성사입니다.
교회는 고해성사를 1년에 적어도 한번은 받아야 한다고 교회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냉담자, 행방불명자의 최소 한계선을 알려주는 것이고, 성사를 자주 보는 것은 자기의 발전상 좋은 효과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는 봄(부활전)과 가을(성탄전)에 판공성사를 실시하는 좋은 제도로 교적의 행정상 신앙을 정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지를 표시하고 있으니 모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고해성사의 비밀은 고해한 내용을 발설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성사에서 얻은 지식에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해 때 얻은 어떠한 지식, 소식을 항상 비밀로 지킬 의무가 있으며 고해 때 얻은 지식을 어떠한 형태로든 이용하는 것을 배제합니다. 고해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의무는 신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사제가 죄의 고해를 듣는 것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사제 자신이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욥서 14, 4 ; 마태 2, 7).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로든 발설할 수 없으며 발설의 경우 독성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해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성사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가 됩니다. 자연법상으로도 고해의 비밀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해성사 때 고해자와 고해신부는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를 함축적으로 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도 고해의 비밀을 지킬 의무에 관하여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성사의 비밀은 불가침 적이고, 고해사제는 말이란 외적 표지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고해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고해성사를 "고해(Confessio)"라는 명칭으로 사용했었는데, 새 예식서에는 전통적 개념인 "참회성사(Sacra Paenit-entia)"라고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호칭은 성사의 지속성이나 반복성을 나타내는 분위기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고해성사의 공식 용어로 "화해의 성사(= Reconciliatio)"라는 개념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지은 죄를 고해성사로써 다시 세례 때와 같은 깨끗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고해성사를 거행하는 여러 양상은 대강 개인 면담식 또는 대화식, 각 개인의 화해예식 형태가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기본 형태는, 짧은 예식으로 신자들이 많은 본당의 고해소에서 시행하는 일반형태, 개별고해와 개별사죄로 여러 참회자들을 하느님과 교회에 화해하게하는 예식으로 한 자리에 여러 사람이 성사적 화해를 얻기 위하여 말씀의 전례를 하면서 이루어지는 형태, 공동고해와 공동사죄의 형태로 개별고해 없이 여러 참회자들이 한꺼번에 공동으로 사죄를 받는 예식 등이 있습니다. 공동고해를 제외한 모든 형태들은 개별고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에서 보속의 마지막 단계까지는 여하한 고해의 형태는 다 있어야 합니다.
개별 고해 없이 이루어지는 공동고해의 경우:
1) 죽음이 임박하여 사제가 각자의 고해를 일일이 들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2) 중대한 필요성이 있을 때로 인정되는 경우인데 많은 고해자들이 개별고해를 법대로 할 만한 시간이 없으며, 오랫동안 영성체를 받지 못하도록 강요당할 경우뿐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판단하는 권한은 교구장 주교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충실히 받기 위해서 성사를 받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해성사의 고유한 은총을 받는 데 있어서 고해자의 준비 여부가 상당히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아니면 형식적으로 교회의 법을 채운다는 생각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고해성사에 외형만으로 참여한다 하여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런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커다란 잘못이 됩니다. 우리는 진실한 통회로 마음을 잡아 다시는 범죄치 않을 결심을 하고 죄를 고해할 때만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 형제와 다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겸손되이 죄의 책임을 자기의 것으로 잘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자비에 신뢰로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평화를 얻을 것이며 성사의 은혜를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가톨릭 신앙입문]
[고해성사 예식서] C. C. K
[성사론 강의록] 가톨릭 대학, 유봉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