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전도서 (3-8) : 내용 (1-6) 1장 지난주에 우리는 전도서가 크게 전반부(1~6장)와 후반부(7~12장)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반부는 삶의 무상함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제 전도서의 각 장을 살펴보며 그 구체적인 내용에 접근해보기로 하자. 『헛되고 헛되다. 코헬렛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라는 1장 2절의 문장은 전도서의 주제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2절만해도 「헛되다」(히브리어 「헤벨」)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헛됨의 최상급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헤벨」은 원래 「입김」 또는 「숨」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것 등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그 어의(語義)가 추상화되고 확장되면서, 실체를 가지지 않은 것, 환상적인 것, 허무한 것 등의 의미로까지 파급된다. 즉, 전도서는 이 단어의 반복을 통해 인간이 인생에 대해 품게되는 갖가지 집착들의 무상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헤벨」이 의미하는 이 「무상함」, 「헛됨」이 부정적 개념만을 내포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는 헤벨이 「숨」과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숨은 삶을 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히브리어 「헤벨」은, 생의 갖가지 요인들(부귀, 명예, 쾌락 등)이 「숨」처럼 인간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들일 수 있지만, 숨이 찰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듯, 지나가고 찰나적일 수 있는 것들을 삶의 본질인양 소유하려 하고, 자기 것으로 고정시키려 할 때, 그것만큼 무상하고 무의미한 노력도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 3은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적용된 일종의 「수사 의문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헤벨」의 긍정적 의미를 기억한다면 결국 저자는 이 질문을 통해, 세상의 일은 수고하고 노력할 가치가 없음을 단순히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공, 그것을 통한 물질적 결과에 연연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영속적일 수 없고 지나가는 것이거늘, 지나친 집착과 과도한 욕구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1, 12부터는 코헬렛이 1인칭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서 본문에 의하면, 그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13절)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14절)을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즉 저자는 코헬렛이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투신하고 백방으로 모색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삶의 이치를 알아내려는 노력 역시 「바람 잡는 헛된 일」이었다는 거였다(15~18절). 삶을 파괴시키는 덫 꿈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꿈을 가지는가, 일 것이다. 맹목적으로 나를 매혹시키는 꿈은 급기야 소중한 삶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망상과 혐오의 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망상적으로 왜곡하거나, 편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기….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기본적 지혜가 아닐까 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7월 1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헛되고 무엇이나 다 때가 있음을 강조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삶은 그렇고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거의 비슷한 단점 때문에 고통 당하고, 거의 비슷한 장점 때문에 작은 성공도 경험한다. 매일 비슷하게 인내하고, 적응하고 포기하며 하루를 살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그래도 새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의지를 되새겨보니 말이다. 인생은 이렇게, 반복되는 오늘의 연속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에서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인간이 얻고 누리기 위해 힘써온 많은 노력과 결과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헛되고 헛된」 것일 수 있음을 전도서 2장은 잘 제시해주고 있다. 2장 삶의 의미를 찾아 모든 것을 다 추구하고자 했던 코헬렛은 「향락」과(2, 1 참조) 「술」에 빠져보기도 하고(3절), 「돈」을 많이 벌어(4~7절) 절대적 권한을 누려보기도 한다(8~9절). 그는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린」(2, 10) 보기 드문 행운아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절)라고 고백한다. 루가 12장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러한 코헬렛의 깨달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창고에 곡식과 재산을 쌓아두며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라고 하던 부자는 그 날 저녁 죽을 운명임을 알지 못한다. 흡족함을 주었던 많은 재물은 그의 삶과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도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수 있는 것이다(20절 참조). 결국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의 영원한 소유주는 될 수 없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내 삶의 주인 역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절망스러워 하던 코헬렛은 급기야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2, 17; 18; 20; 23절 참조)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4~25절에서는 이러한 비관적 관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메시지가 제시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2, 24 참조)며 강조하고 있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눈에 드는 사람에게 주는 지혜」이다(2, 26 참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지혜야말로, 그 어떤 부귀, 영화, 쾌락보다도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유일하고 가치로운 선물이라 하겠다. 3장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3, 1)라고 시작된 3장은 모든 것은 적절한 때가 있음을, 그리고 그 때(시간)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강조한다. 세상 만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따라서 시간의 주인 역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하느님의 절대적 권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재를 성실히 살아갈 의무」뿐이다. 처음 2~8절은 매 절마다 상반되는 사건을 대비시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대조는 모든 인간사가 사실, 양극단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나쁜 일, 슬픈 일, 죽고 싶은 일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새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돌아오곤 하는 것이 인생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진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11절) 만드시니, 인간 측에서는 그 계획을 결정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어진 사건 안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 주어진 환경 안에서 되도록 좋은 일을 할 것 등임을 가르치고 있다. 코헬렛은 그것만이 진정한 행복이요(12~13절), 「하느님의 은총」(13절)임을 강조한다. 더욱이 하느님은 적당한 때에 당신 공의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시므로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라 해도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16~17절). 악인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위에 상응한 심판을 받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지혜롭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22절 참조). 그 외의 것은 인간이 고민할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결정하시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 힘들어도 지금은 힘든 때인가 보다 생각하고 실망하거나 겁먹지 말기, 작은 행복에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말해보기…. 이런 마음가짐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스스로 지켜 가야할 소중한 마음가짐들이다. 그리고 당신이 필자의 이런 제안에 동의하시는 분이라면, 당신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훌륭한 지혜와 은총을 충분히 받으신 분이다, 정말로…. [가톨릭신문, 2004년 7월 1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때 행복” 세상의 폭력과 억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번 주에 살펴볼 전도서 4장은 그 답을 「질투」와 「경쟁심」에서 찾고 있다.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짙은 혐오는 자기 삶 전체를 폭력적으로 비하시키고, 잘 알지도 못하는 타자의 삶을 절대적으로 우상화하게 한다. 그뿐인가. 「평생을 일해도 가질 수 없다」는 자괴적 동경은 역설적 불가능성이 되어,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은 죄다 도둑(?)이라는 비난과 비판을 일삼게 하기도 한다. 잠언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나의」 삶과 그 운명의 참 얼굴을 찾아내는 것, 즉 자기 길과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모색뿐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4장 4장은 초반부를 「억압」에 대한 주제로 시작하고 있다. 3장 17절에서 이미 「악인을 심판하시리라」는 기대를 피력했지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폭력」과 「억압」은 인간 사이의 「경쟁심」에서 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4~6절은 「질투」와 「경쟁심」을 경고한다. 인간 본성 안에 각인된 경쟁심은 언제나 「남보다 더 얻으려고 기를 쓰게」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말라죽는」 일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7~16절은 자신의 경쟁심과 독선 때문에 홀로 고립된 사람들의 비참함, 그들 삶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다해도 행복하지 못하고(8절 참조), 왕이 되어 통치한다해도 역시 「바람잡는 일」일뿐이다. 『한없이 많은 백성이 그를 떠받든들』(16절), 다음 세대에 가면 아무도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코헬렛은 경쟁의 무익함과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인생은 결국,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때 진정으로 행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5장 5장부터는 명령문 형태를 통해 구체적인 훈계와 권고를 제시한다. 처음 강조된 주제는 「종교심」(제사와 관련된)이다. 성전에 갈 때, 자신의 『악한 짓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현재 공통번역으로는 4, 17; 라틴어 성서 5, 1) 아는 마음을 비판한다. 그저 자신의 종교적 책임감을 충족하기 위한 의무행위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종교심을 위한 이기적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임을 강조한다. 이어 「서원」에 대한 부분이 제시된다. 말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닐진데, 하물며 하느님께 드린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2~6절). 「하느님께 대한 경외」라는 지혜문학의 기본적 주제가 다시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7~19절에서는 수탈과 억압에 대한 고발이 반복되고, 여기에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이라는 직접적 충고가 덧붙여진다. 『욕심을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니고(9절), 『재산이 많을수록』 돈은 더 필요하기 때문이며, 부자는 『아쉬운 것 없어도 뒤척이기만 하며 제대로 잠 못』 이루기 때문이다. 결국 코헬렛은 『많은 재산은 눈요기밖에 될 것이 없다』고 결론짓는다(10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는』(15절) 인생에서 코헬렛이 깨달은 진정한 행복은 『열심히 살아 수고한 보람으로 살고, 거기에 만족하는 일』(17절)이다. 부와 재산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누구에게나 가장 적절한 몫을 「선물」로 정해놓고 계시기 때문이다(18절 참조). 『하느님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며, 그러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지 말 것이다(19절).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마음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걸 아시는가? 영리하기도하지, 누가 그런 지혜로운 꽃말을 지어주었을까…. 전도서는 네 잎 클로버, 즉 요행을 찾기 위해 평생을 낭비하는 우리네 실상을 예리하게 꼬집고,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무상하고 헛된 일임을 설파한다. 그리하여 제대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 요행보다는 우리 곁에 있는 작은 행복을 방관하지 말기, 순간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말기를 진정한 삶의 본질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는데 삶을 낭비할 것인지, 주어진 내 삶의 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살 것인지, 하느님을 알고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 선택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현실은, 결코 비참하지만도, 혹은 누추하거나 무섭지만도 않다. 늘 곁에 있어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행복」이니 말이다. 다만 자신의 작은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소신있는 노하우와 기술이 필요할 뿐! [가톨릭신문, 2004년 7월 2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지혜 삶을 살면서 요구되는 여러 자질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이를 통해 세상과 나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합의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남을 무너뜨리기 위해, 혹은 내 존재의 우월성을 누구와의 비교를 통해 이기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좀더 자발적으로 수확하는 것, 그 안정되고 평화로운 마음만이 전도서가 제시하는 「헛되지 않은 삶」의 실체라고 하겠다. 6장 6장은 코헬렛이 지금까지 피력한 내용을 다시 한번 수렴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자손을 낳고,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2~7절)가 제시되고 있고, 8절은 2~7절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 즉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고 해도 가난하다면』 그의 지식이 무슨 소용 있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6장 후반부는 지금까지 서술된 모든 내용의 신학적 근거가 제시된다.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는데,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께 『왜 이러느냐고 따질 수 없다』. 이것이 삶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성실해야할 근원적 사유이다(10절). 즉, 삶을 제대로 잘 살기 위해 가장 요구되는 태도는 「인간과 그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11~12절).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이에 항의할만한 능력을 「현실적으로」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살아갈 때 가장 안전하고 의미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7장 7장부터는 지금까지의 사색적 논조, 고백적 문체와는 다른 서술 형태가 등장한다. 일종의 잠언집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내용은 잔칫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는 것으로 시작된다(1~4절). 잔칫집이야 사는게 언제나 축제요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초상집은 사람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5~10절 사이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책망을 듣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롭다해도 평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좋은 일도 있게 하시고 나쁜 일도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일이 잘되거든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13~14절). 15~22절은 「중용」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언뜻 읽어보면 지금까지의 논지를 부정하는 내용인 듯이 보여진다. 살다보니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다가 망하고 나쁜 사람은 곱게만 늙어가니, 너무 의롭게 살려고도, 악하게만 살려고도 하지 말라는 충고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여기에서 사용된 「너무」, 「지나치게」라는 히브리어 부사이다. 이들은 질보다 양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치중한 의로움」을 의미한다. 즉, 『너무 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16절의 표현은 너무 외적인(가식적) 의로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한 인간의 의로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23~29절은 코헬렛이 풀 수 없던 신비 두 가지가 제시된다. 「지혜」와 「여자」이다. 그는 지혜를 찾아다녔지만 너무도 멀리 있음을 깨달았고(23~24절), 여인은 죽음보다 더 위험스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26~27절). 사족처럼 덧붙여진 한마디.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단순한 원리로 있게 하셨는데, 이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인간 스스로라는 것(29절)!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장마와 태풍이 올 때마다 많은 준비로 방어태세를 갖추지만, 번번이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의 유비무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결코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나 자신의 생명조차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최악을 대비하는 가장 똑똑한 선택은 아마도 「세상과 삶을 하느님안에서 다시 읽어내고 이를 긍정하는 태도」가 아닐까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수 있고, 자신을 돌봐줄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삶과 세상에 대한 완강한 고집과 오만함이야말로 내 삶을 내 것이 아니게하는 치명적 장애임을 먼저 깨닫는 자만이, 삶을 얻는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 첨단 21세기가 되어도, 삶의 모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똑부러지는 명확함이 현대사회의 미덕처럼 각광받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는 「무난한 사람」이 가장 「무난하게」 삶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뿐인가, 참여와 연대를 목청껏 외치고 있지만 정작 사람끼리의 「소통」은 여전한 관념적 주제로만 남아있다. 결국 이 시대의 「정의로운 가치」들을 현실화하기에, 우린 아직 너무 추상적이고 사변적 수준에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닐는지…. 코헬렛 8장은 진실과 현실이 서로 충돌하는 시대의 모순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8장 8장은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코헬렛에 의하면 『찡그린 얼굴을 피고 웃음 짓는 사람』(1절)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어 임금에게 복종하라는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는 곧 주어진 삶, 즉 자기 운명에 대한 「긍정적 순명」과 상통한다. 왕은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인간 측의 대표자이고 따라서 왕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상이 지혜문학의 보편적 사상이기 때문이다(잠언 14, 35; 16, 14; 19, 12; 24, 21 참조). 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때, 지혜자는 『어떤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도 알게 된다』(5절). 8장의 후반부(11~17절)는 삶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모순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당장 벌을 받지 않기 때문』(11절)이라고 설파하면서, 죄를 짓고도 성전에서 버젓하게 의인 행세를 하고, 그러고도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며,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보상은 혼자 다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삶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12~14절). 이러한 삶의 모순과 불의 속에, 코헬렛이 제시한 가장 좋은 일은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15절)이다. 코헬렛은, 괜히 악인들의 성공과 착한 이들의 억울함을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수정하려 한들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파악하거나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17절). 코헬렛의 이러한 주장은, 삶을 마구 즐기라는 의미처럼 들릴 수 있지만, 허망한 세상 먹고 마시는 일이 최고라는, 부정적 염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매 순간을 즐겁게 살려는 태도는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길 때만 가능한 은총이며, 따라서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결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9장 9장부터는 코헬렛의 권면이 주요 내용으로 등장한다. 가장 처음에 다루어진 주제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죽은후를 고민하기 보다, 살아있을 때 제대로 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 보다』(4절)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있을 때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일」(7절)이다. 인간 스스로 조정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인간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각자의 운명을 믿으며 최대한 즐겁게 자신의 삶을 수용하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10장 코헬렛은 9장에서 언급된 지혜의 가치와 한계성을 10장에서 다시 부연한다. 세상은 불가사의로 가득차 있다. 어리석은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하고(6절), 작은 실수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인간의 계획을 순식간에 철회시킨다(8~11절). 이러한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 가장 어리석은 이는 「말만 많은 사람」이다(12~15절). 한치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은밀한 생각과 비밀로 붙인 대화도 때로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만큼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말에 신중을 기해야한다(20절). 고마움을 통한 성숙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 제목을 보면서, 세상에, 별게 다 힘이 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전도서 10장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불가사의로 가득차 있다. 별 것 아닌 것이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별 것 아닌 것을 억지로 나의 힘이라고 우기며 고집스레 삶을 견디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고 그것에 감사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성숙하고 강한 힘은 없는 것 같다. 질투가 진정한 나의 힘이 아님을 깨달은 언젠가부터는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비교하지 않고 기쁘게 사는 것, 현명한 인생 위한 게임의 법칙 『Present is present!』(현재는 선물이다)라는 말이있다. 영어 단어 present가 「현재」와 「선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짐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문장인데, 지금 이 순간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나의 「현재」는 사실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신 「선물」임을 강조하는 문장이다. 「현재의 발견」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전도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현실주의」이다. 『현실을 즐기라』는 문장이 다소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는 있지만, 이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에 자신의 현재를 「살지」 못하는, 서글픈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짬뽕을 먹고 있는데 충분히 맛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자장면과 비교하지 않으면 못배기고, 그 고단하고 불안한 비교 때문에 어느 맛도 포기해야만 하는 인간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의 덫은 십중팔구 불행을 자초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 현실에 대한 최선의 사랑」만이 궁극적 삶의 과제임을 강조하는 현실주의가 바로 전도서의 주요 내용이라 하겠다. 11장 『돈이 있거든 눈감고 사업에 투자해 두어라.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윤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라고 번역된 공동번역 11, 1은 원래 『너의 빵을 물위에 던져라』라는 표현을 풀어 번역한 구절이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히브리 독자들에게는 단방에 의미가 전달되는, 보편적 격언이었을 듯하다. 무엇이고 투자하였을 때 그 결과는 반드시 내게로 돌아온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실 지는 알 수 없지만』(5절),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역설하는 2~6절 역시 현실에의 충실을 강조한다. 11, 7~10절은 전도서가 제시하는 핵심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햇빛은 고마운 것, 해를 쳐다보며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7절). 살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은총이요 선물임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인생에는 불행한 날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할』 일이지만,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사는 것은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그러므로 코헬렛은 젊은이들에게, 삶을 즐기라고 권고한다. 물론 여기서의 「즐김」은 단순한 쾌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본질과 진수를 마음껏 향유하며, 현재에 전적으로 충실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즐김에도 단서는 붙는다. 『하느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재판에 붙이시리라는 것』(9절)이다. 12장 12, 1~8은 11, 7부터 시작된 전도서의 결론적 메시지를 이어간다. 11, 7~10이 「즐기라」는 동사가 강조되어 있다면 12, 1~8절은 「기억하라」는 동사가 부각되어있다. 죽음을 은유하는 종말론적 서술들을 통해,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인간이 해야할 일은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촌음을 아껴 삶에 성실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12, 9~14은 제자에 의해 지어진 「발문」(후기)이라고 볼 수 있다. 1, 1절에서 코헬렛을 소개했던 편집자는 다시 코헬렛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편집자는 코헬렛이 지혜의 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남겼으며(9~10절), 이 모든 말씀과 가르침은 사실 하느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11절). 편집자의 마지막 당부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것』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일을(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도) 심판에 붙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13~14절). 지혜문학의 대표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께의 경외」를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전도서 전체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결론 전도서의 지혜는 살면서 불가피하게 겪게되는 일상의 좌절과 관련되어있다. 세상에는 진부한 상식과 전통적 논리만을 가지고 풀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기쁘게 사는 것」임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쾌락주의와는 구별되는 자못 감동적인 현실주의로써, 자아를 잃고 공중에 뜬 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내 주변과 현실에 산재하는 기쁨, 행복, 평화 등을 발견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사실, 인간 개개인이 경험하는 혼란의 미궁은 타인에 의해서 조장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적 힘에 의해 형성된 매혹에, 내가 동의함으로써, 자청하여 비교의 덫에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위험한 매혹에서 벗어나는 것」, 내 인생을 살기 위해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게임의 법칙은 아닐까 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1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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