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룻기 (8) : 신학사상 모든 것을 비우고 인내할 때 충만한 사랑과 은총 채워져 일치란, 내가 이만큼 양보하니 너도 이만큼 양보해, 라는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읽은 어느 신부님의 강론집에는 좀 색다른 말씀이 적혀져 있었다. 일치는 『그가 나보다 훨씬 이기적일지라도, 수용하고 참아주며 인내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하시니 말이다. 그랬구나…. 왠지 마음이 한가로워지고 타인에게 좀 더 다정해질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오미와 룻의 감동적인 사랑 역시 이런 배려와 인내, 일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던가. 이제 룻기의 마지막 순서로 이 책의 신학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약자의 보호자인 하느님 룻기는 지혜로운 나오미와 착한 이방여자 룻에 대한 일종의 「여인열전」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통한 구원역사를 보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분명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신분에 있었던 과부, 외국인, 고아를 당신의 직접적 보호아래 두시며 그들을 사랑하신다. 더욱이 나오미나 룻처럼, 행복하건 불행하건 주변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당신을 성실히 믿어온 이들에게는 더 큰 보상으로 값해주신다. 2) 숨어계신 하느님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룻기는 다른 성서에 비해 하느님의 구체적 행위가 별로 많이 묘사되지 않고 있으며, 이야기의 극적인 반전 역시 「우연」이라는 장치를 통해 포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이 보아즈의 밭이었음이 「우연」으로 제시되고 있고(2, 3 참조),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도 기적 사건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삶의 실상을 좀더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구성으로 이해된다. 사실 우리는 자기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뚜렷이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연」으로 인식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필연」이라는 것을 저자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내재적으로 이 모두를 계획하고 추진하신 하느님의 활동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보편적 구원사상 룻기는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잘 제시해준다. 한낱 이방여자에 불과했던 룻이 하느님께로 귀화하면서 그녀의 비중은 거의 아브라함의 위상에 비교될 정도로 극대화된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나는 다 잘 들었다』(2, 11)는 내용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말씀(창세 12장)과 유사한 형태로 되어있으니 말이다. 4) 상생의 법칙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들끼리의 공존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제시하는 명제이다. 그러나 룻기는 그 어느 책보다도 진보된 여성성과 그들의 관계를 제안한다. 곤경에 빠진 착한여자 룻을 구해준 보아즈와의 사랑에 관심이 집중되기보다는 그러한 긍정적 결과를 내게 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감동적 사랑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감동적 사랑은 하느님의 축복을 이끌어 낸다. 5) 다윗 이 책의 히브리어 본문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는 「다윗」이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선택된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얼마나 훌륭했으며 하느님의 인도를 받은 이들이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저술 목적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빈손 수련수녀 시절, 잠잘 때도 베고 잘 정도로 좋아하던 소화 데레사의 책에는 유독 「빈손」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어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사랑과 헌신은 사실 그녀가 빈손이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비어있었기에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 그녀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룻기 역시 빈손으로 돌아온 두 여인의 운명이 하느님을 통해 어떻게 충만히 채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오순절(봄 추수기)에 읽었다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빈손으로 살아갈 때, 추수할 곡식은 하느님께서 직접 채워주신다는 주제가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빈손일 때라도 태연하게 그 불안을 견딜 수 있지 아닐까…. 봄이 오고 있다. 연구실이고 방이고 불필요한 것들을 좀 치워야겠다. 비었을 때 삶의 공간은 오히려 충실하고 소란스럽지 않으며, 반듯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질 수 있을 테니. [가톨릭신문, 2005년 2월 2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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