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애가 (3-7) : 내용 (1-5)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 부각, ‘옷자락에 묻은 부정’ 살펴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졌을 때, 세상이 주는 허황된 희열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될 때, 그렇게 철저하게 고독한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맨얼굴을 보여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이다. 『야훼여, 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아주십시오. 애가 타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애가 1,20)라고 절규하는 예루살렘의 고통은, 그러므로, 자신의 참 얼굴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은총이요 기회였다고도 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때에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전반적 내용 애가의 지배적 분위기는 「비애」이다. 다섯 개의 조가(弔歌) 모두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장, 예루살렘의 참상 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되며, 전반부(1~11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찬란했던 영화와 현재적 참상이 대조되고, 후반부(12~22절)에서는 예루살렘의 내면적 고백이 표현된다. 1, 1~11(전반부) 1절은, 한 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예루살렘이 이제 「과부」가 되어 혼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미 룻기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과부는 유다사회 안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의 존재였다. 그 어떤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과부가 된 예루살렘은 『위로해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상태(2절)를 통해 자신의 철저한 고립을 호소한다. 친구들이 모두 「원수」가 되어버린 상황, 그것이 바로 애가가 제시하는 탄식과 애도의 주원인이었던 것이다. 5절에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임이 처음으로 명시된다. 그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은 고통을 내리셨고, 결국 그들의 아이들까지도 포로가 되어 적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6~7절에서는 과거 찬란했던 시온의 영화가 현재 얼마나 처참하게 되었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시온의 죄는 많은 이들에게 혐오를 주었고, 예루살렘 자신에게도 환멸스런 것이었다. 시온은 부정이 자기 옷자락에 묻어 있는데도 그 종말을 생각하지 못했고(9절), 그 결과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소」까지 유린당하게 되었다(10절). 먹을 것이 없어, 급기야 패물을 음식과 바꾸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예루살렘은(11절), 비로소 주님께 간청을 드리게 된다. 1, 12~22절(후반부) 이제 예루살렘은 화자(話者)가 되어 직접화법으로 「하느님에 대하여」 언급하고(12~19절), 「하느님께」 직접 호소한다(20~22절). 모든 명사가 성(性)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에서, 도시가 의인화 될 때는 일반적으로 「여성」으로 은유된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한 여인의 목소리로 자기 신변의 변화를 호소한다. 예루살렘(시온)은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보다 더 불행한 처지가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질문한다(12절). 이어 이스라엘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신 하느님의 행위가 길게 나열되는데(13~17절), 그분은 그들에게 불을 보내시고, 그물을 쳐놓아 낚아 채셨으며, 모든 것을 황폐케 만드셨다. 그들의 목 위에 멍에를 올려놓으셨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예루살렘을 치셨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나 어찌 통곡하지 않으리오』라는 16절의 절규는 예루살렘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잘 표현해 준다. 그러나 18절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강력한 일격이, 사실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음이 제시된다. 그분이 나(예루살렘)를 대적하여 짓밟으신 이유는 『내가 그분의 명을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참에 빠진 시온은 시급히 애인들을 불러보기도 하지만 곧 그들의 배신을 뼈저리게 체험한다(19절). 이 모든 실패를 통해 결국, 예루살렘은 그녀를 도우실 분은 하느님 한분뿐이심을 깨닫게 된다(20~22절). 옷자락에 묻은 부정 애가 1장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구절은 「옷자락에 묻은 부정」을 알지 못한다는 9절의 말씀이었다. 사실, 내 스커트에 무엇이 묻었는지, 자기 자신은 쉽게 알아낼 수가 없다.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눈치 못 채고 있는 부정, 죄, 이기심, 야망…. 이런 비극적 모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가가 제시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옷에, 그리고 얼굴에 묻은 것들이 얼마나 혐오스런 것들인지를 깨달으라는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뼈저린 고통이 주어지겠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바로 그 고통의 끝에는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2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예루살렘은 전쟁의 비극에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존재 발견 나는 솔직히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제일 무서워하는지를 잘 몰랐었다. 남들이 심장 떨려 못 본다는 호러 영화도 잘보고, 짐승의 피로 만들었다는 순대와 선짓국도 잘 먹으니, 무서운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 중 한분이 돌아가시는 꿈을 꾼 다음이었다. 내게는 「가족의 죽음」이 가장 큰 공포였다. 걱정이 되어 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당신 모두 죽을 기미가 없는게 문제」라고 하셔서 또 한번 딸의 잔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이상한 일이다. 남들 앞에서는 늘 기죽어 사는 편인 내가, 꼭 부모님께만은 큰소리를 치고 그분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만다. 부모님께 대한 태도를 반성해 보면, 반항을 일삼던 사춘기 때보다 나아진게 없다는 생각이다. 애가 2장에는, 어미(예루살렘)의 품에 안겨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며 죽어가는 아이들의 비극이 묘사되어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 자주 보아온 모습이지만, 사실 품 안에서 죽는 혈육의 죽음보다 더 한 공포는, 이 세상에 없는 듯 하다. 2장 2장의 핵심적 주제는 첫 시작(1절)과 마지막(22절)에 잘 제시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곧 「주님의 진노의 날」에 대한 것이다. 2장 역시 알파벳 순서로 엮어져 있고,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된다. 전반부(1∼10절)는 예루살렘 파괴의 참상을, 후반부(11∼22절)는 예루살렘을 치신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의 딸 예루살렘」의 가슴 아픈 대화가 제시된다. 2, 1∼10 이 부분에서 하느님은 마치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모든 것을 도살하시고 파괴하시는 약탈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쳐부수시고, 허물어버리시며, 쓰러뜨리시고, 불 지르시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무너지고(9절), 성벽이 허물어졌으며(7∼8절), 궁궐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2, 5절). 심지어 하느님은 당신의 성전(4절), 초막(6절), 제단과 성소(7절)까지 무너뜨리셨다. 예루살렘의 참상은 시각적으로만 제시되지 않고 청각적으로도 표현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곡성과 아우성 속에 오직 한 군데서만 축제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은 적들이 부르는 축제의 함성이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7절). 9∼10절에서는 유다의 최고 지도자들의 말로가 제시된다. 임금과 고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가고(9절), 유다의 정신적 리더들인 사제들, 예언자들, 원로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어떤 지혜도 받을 수 없어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조용히 애도를 올릴 뿐이다. 2,11∼22 11∼12절에서는 전쟁의 참상 중,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광장과 길가에 쓰러져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모습이다. 어미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지만 어미 역시 죽어가고 있어, 그저 체념하고 자식의 죽음을 지켜볼 뿐이다. 13절에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임이 3번이나 연속적으로 제시된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강조된다. 14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유다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죄와 무관하지 않음을 고발하는데 그 때문에 『아름다움의 극치요 온 누리의 기쁨』(15절)이라고 숭앙을 받던 「처녀 예루살렘」은 이제 빈정거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17절은 이러한 비극이 바로 『주님의 뜻하신 바』였다고 명시한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진심으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시내처럼」 흘리며, 쉬지도 말고 「일어나 통곡」(18∼19절) 해야 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네 어린 것들』(19절)을 위해 간청해야 한다. 20∼22절에는 예루살렘의 절규가 제시되어 있다. 『주님, 살펴보소서』라는 간청으로 시작된 이 고백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대목이다. 예루살렘이 자신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그녀를 강타한 적들(바빌론)이 아니라 하느님께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심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정된 비극 「예정된 비극」이란게 있다. 실패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 길에서 돌아서지 못할 때, 죄송한 마음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욕심과 그릇된 관계를 접지 못할 때, 우리 스스로는 예정된 비극을 직감한다. 예정된 비극을 느끼면서도 돌아서지 못했던 예루살렘은, 결국 「그날」(주님 진노의 날)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었고, 그녀가 가장 무서워했던 사건(아이들의 죽음과 적들의 승리)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뼈아픈 고통은 구원의 시작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통곡 속에 함께 울고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비로소 발견하고, 왜 그분이 이런 비극을 허락하셔야 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으니….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2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진정한 승리와 성공의 기점은 자신이 패자임을 인식할 때 내가 하고 있는 착각 중의 하나…. 사실 나는 내 삶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야심이나 욕심이랄게 없는 줄 알았다. 아니 야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주제넘고 뻔뻔스런 일이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가난한 삶 안에도 야망과 욕심이 미세하게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과잉된 자의식, 그래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의 관계…. 그런 「망각」이 비루하고 고통스런 현재의 원인임을 깨달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예루살렘은, 내가 졌구나, 내가 죄를 지었구나, 라는 사실을 애가 3장에서 담담하게 인정한다. 자신이 사랑해야할 존재는 하느님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의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진정한 승리와 성공이 시작되는 「기점」이란, 곧 내가 패자임을 진심으로 인식한,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3장 3장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된 애가의 「중심」에 위치한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제작되는 애가의 특수한 기법은 3장에서 그 극치를 이루는데, 3개의 절들이 한 알파벳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에 3절씩의 내용이 배당되어 전체 66절(22×3)로 형성되어있다(물론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발견되지 않는다). 3장이 제시하는 또 다른 특징은, 비극의 주인공이 「여인」(1~2장)에서 「남성」(3, 1참조)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3장은 모두 세부분으로 구별되는데 첫 부분(1~20절)은 「고통스런 현실」을, 두 번째 부분(21~39절)은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회고」를 언급한다. 마지막 부분(40~66절)은 고통을 받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주제로 하고 있다. 1~20절 1절은 『고통을 겪은 사나이』인 「나」와 정확히 그 신분을 알 수 없는 「그」의 관계로 시작된다. 「그」 때문에 받게 된 「나」의 고통이 절절한 심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내 살과 살갗을 닳아 없어지게 하고 내 뼈를 부수어버려』, 나를 『죽은 자들처럼 살게』 하였다(4~5절).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그」의 정체가 명시되는 것은 18절에서인데, 그는 바로 「야훼」이다. 나에게 『행복을 잊게』한 존재가 주님, 야훼였던 것이다(17절 참조). 21~39절 이전까지의 내용과는 달리 이제 21절에는 「희망」이 등장한다. 22~30절에서 화자는 주님의 자애와 자비가 끝나지 않았음을 믿고 희망한다. 특별히 25~27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모두 「토브」(좋은)라는 히브리어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야훼의 좋으심(선하심)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31~39절에서 저자는 좋으신 주님의 정의가 두려운 심판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임을 신학적으로 조망한다. 그분은 『고통을 주셨다가도 당신의 크신 자애로 불쌍히 여기시는 분』(32절)이시기 때문이다. 40~66절 39절까지 「나」라는 화자(話者)는 혼자였다. 그러나 40~47절에서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갑자기 등장한다. 이는, 「예루살렘의 패망」이 원래 공동체적으로 경험된 비극이었지만, 애가가 이를 한 개인의 비극으로 은유해서 제시하였기에 생긴 균열로 보인다. 애가의 저자는 「우리」라는 연대적 공동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제 「계약」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좀 더 깊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하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였음을 자각하고, 모든 재앙과 불행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43~54절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의 내용이 다시 시작되는 듯하지만, 이러한 원망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55절). 그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57절에서, 결국 이 모든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한 화자에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이후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며 「후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구원의 희망이 다시금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깊은 구렁 속에서 부르는 이름 바다 색깔이 크레파스 상자에 담겨져 있는 코발트블루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바다를 처음 보고 난 이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마주하게 된 그날은, 공교롭게도 구름이 많이 낀 날이었다. 바다 색깔이 잿빛이라는 사실은 내게 충격을 주었지만, 이내 유익한 체험이 되었다. 「바다색은 곧 하늘색」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애가 3, 55의 표현처럼 깊은 구렁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보지 않은 사람은 그분의 존재, 그리고 그분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럴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성찰하고 바로 잡아야 슬픈 이야기를 읽었다. 사랑에 빠질 때 여자는 남자보다 아홉 배는 더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슬픈 이야기도 있다. 교육론 「에밀」로 유명한 루소는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루소보다 자기 아이들을 아홉배는 더 사랑했을 아이들의 엄마는 어디 있었던 것일까? 이번 주에 살펴볼 애가 4장은 너무도 충격적인, 그러나 오늘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을 일상의 비극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매정한 어미 예루살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자신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을 동일화시키거나 혼동할 때, 아이의 심장은 멎어버린다. 아이자신은 실종되고 엄마의 욕망과 환영(幻影)이 아이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예루살렘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그대로 우리 현실 안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욕망 때문에 멎은 심장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결국 성인이 되어 엄마의 그늘을 벗어날 때면, 그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엄마의 심장이 멎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매정한 외면에, 그리고 그 비극적인 고독에, 말라버린 심장으로 노후를 살고 싶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은 바로 이 순간부터라도 진정한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절망과 회한이 인생의 마지막을 삼켜버리는 일이 없도록…. 4장 4장 1절은 「에카」라는 탄식의 소리로 시작되는데, 이는 1장, 2장과 동일한 시작이며, 예루살렘의 비통한 현실이 이어진다. 『황금과 보석이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고 거리에 흩어져 있다』는 1~2절의 표현은 한 때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을 은유한다. 3~10절의 내용은, 어미 품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묘사한 애가 2, 11~12.19~20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 부각되어 있는 소재는 「사막의 타조」(3절)인데, 이 동물은 자기 자식에게 무관심하고 매정한 동물로 유명하다. 알을 모래에 낳아 그대로 방치하고 전혀 돌보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욥 39, 13~18참조). 애가의 저자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는 어미 예루살렘의 모습을 타조에 비유하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맛있는 것만 먹고 고급 옷만 입고 다니던 예루살렘의 아이들은 이제, 거리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고, 쓰레기 더미와 함께 쌓여 있다(5절). 예루살렘의 고통이 이렇게 극심한 것은 그녀의 죄가 「소돔」의 죄보다 더 큰 때문이었다(6절). 예루살렘이 겪는 극도의 고통은 이제, 차라리 칼에 찔려 죽는 것이 낫겠다는 호소로 이어진다(9절). 10절의 표현은 매우 충격적인데, 자식을 잡아먹는 어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품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보며 절규하던 2, 20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식인」(食人, Cannibalism)은 구약성서 안에서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신명 28, 53~57참조). 11~12절은 예루살렘이 그런 처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고 묘사한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느님의 처소이니(시편 46, 5)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과 허황된 자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하느님은 당신 친히 예루살렘을 치셨다(11절). 13~16절은 그렇게 예루살렘이 당한 극도의 고통과 징벌이 사실은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의 죄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13절), 백성은 「피를 흘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의인을 부정한 자로 간주하였다. 유다인들은 피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레위 12, 5.7 참조).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진 예루살렘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하느님의 징벌과 분노 앞에서는 그 어떤 외교적 동맹관계나 노력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4장 마지막에서는 이스라엘의 적수였던 에돔에 대한 징벌이 예고되고, 반대로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과 회복이 약속된다. 『죄벌은 끝났다』(22절)는 것이다. 멀어진 시선 인간은, 스스로가 얼마나 타인으로부터 멀어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 멀어진 타인만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일까, 상실감과 고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헛되이 도움을 바라느라 우리 눈이 멀어졌다네』(17절)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혹은 타인)이 내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문제였음을 정확히 성찰한다. 다른 곳을 보느라 멀어진 시선이라…. 『시선이 먼 데를 본다는 것은 아름답고 또한 위험한 일』이라고 표현한 어느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위험할 수도 있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을, 이제는 접어야할 때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1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용서 구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 구원 발견하는 첫 각성 매스컴을 통해, 병중에 계셨던 교황님을 뵙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든 모습 속에서도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진실은, 살아있는 한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삶,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야 한다는 「삶에 대한 경외」였던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다고 했던가…. 교황님이 한국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 성당에서 나눠준 책받침 때문에 내 마음의 우상이 잠시나마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아이들에게 우상은 늘 책받침 안에 존재했었다. 영화배우나 야구선수의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쓰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교황님을 우상처럼 책받침에 담아 사랑했던 시절이었다. 그분의 선종을 통해 아름답고 충실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그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구약성서가 고발하는 예루살렘의 죄는 언제나 「하느님을 잊은」 데에서 발생했다. 하느님을 잊고 살아온 세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였고 비극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예루살렘은 이제 애가의 마지막에서 『기억 하소서, 바라보소서』(5, 1)라는 탄원을 쏟아내며 간청한다. 잊혀짐과 바라봄, 망각과 기억. 이는 단순히 예루살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관계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네 삶의 딜레마가 아닐까. 5장 5장은 1, 2, 4장의 경우처럼 전체 22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알파벳시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히브리어 본문은 매우 체계적인 운율과 대구법(parallelism)으로 되어 있는데 5장 전체의 내용은, 당신 백성에게 구원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원하는 기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첫 구절은 야훼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는 것(주님, 기억하소서!)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의 가시적 표현이었던 「약속의 땅」은 남들(외국인과 이방인)에게 넘어갔고(2절), 예루살렘은 이제 사회에서 가장 고립된 존재, 고아와 과부처럼 되어버렸다(3~4절). 더욱 예루살렘에 고통을 주는 일은 자신의 하급자였던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8절). 그뿐인가, 굶주림, 폭행, 살인 등으로 온 사회는 혼란에 쌓여 있었다(11~14절). 마음에서 기쁨은 사라졌고, 예루살렘이 누렸던 모든 영화와 명예는 추락하였다(15~16절). 그러나 16~17절에서 애가의 저자는 다시금, 이런 모든 고통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한다. 그 죄 때문에 마음은 괴롭고 눈은 어두워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며 용서를 바라는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신다(19절). 20절에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사학적 질문들, 『어찌하여 저희를 끝내 잊으려 하시나이까?…. 버리려 하시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확신 속에 이제 이스라엘은 「회개의 은혜」를 간청한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이러한 간청은 매우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비로소, 회개도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22절에는 다시 한번 수사학적 질문이 등장한다. 『저희를 물리쳐버리셨나이까? 저희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셨나이까?』 이는 예루살렘이 처한 상태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애가는, 통곡도 복수도 아닌, 회개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와 현 상태에 대한 인식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축하해, 예루살렘! 차라리 내가 피해를 입는 편이 낫지, 남에게 폐 끼치는 일만큼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 여성들 아닌가 싶다. 나부터가 그렇고 어머니가 그러시며, 할머니도 그러셨다. 물론 할머니의 할머니도 그러셨을 것이다.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면 죄송합니다, 용서 하세요, 라는 표현이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다. 너무 깍듯한 예의는 타자와 주변을 부담스럽게 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요 질서이다. 아무튼, 예루살렘은 이제야,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토록 긴 고통의 심연을 건넌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가 하느님께 너무도 죄송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욱 값진 결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과거의 습관에서 해방될 수 없음을 깨닫고, 애가의 마지막을 『야훼여 주께 돌아가도록 우리를 돌이켜 세워 주십시오』(5, 21)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 청하는 법을 배우게 된, 그리고 자신의 고통과 죄를 하느님께로 가져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배우게 된 예루살렘에게, 그러므로, 축하해 라는 인사는 결코 요란한 비약이 아닐 것이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고통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하는 최초의 각성이기에….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1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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