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문화] 예수님과 세포리스 워터맨의 ‘세포리스 문화설’ 1931년 여름, 미국 미시건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세포리스(찌포리)’라고 불리는 나자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 벳 스안, 므기또 등 유명한 대도시를 발굴한 것과 달리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신약 시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세포리스가 갈릴래아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발굴한 결과 1세기에 건설된 로마 시대의 극장(4,500명 수용)과 귀족의 저택 흔적이 발견되었다. 비록 계속 발굴하지는 않았지만, 신약 시대의 나자렛은 문명에서 고립된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어린 시절 예수님의 교육과 문화 배경을 이 도시에서 찾으려는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었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청중을 사로잡는 비유, 현실감 있는 율법 해설, 심오한 사랑의 윤리 등은 나자렛 같은 보잘것없는 시골 출신인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터맨 교수의 ‘세포리스 문화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12세기 초 세포리스를 차지한 십자군의 성전 기사단은 언덕 위에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했는데, 그때부터 그곳이 성모 마리아의 고향이라는 전승이 생겨났다. 따라서 그들은 마리아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안나 교회’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십자군 전승을 참고한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 외가에 자주 들렀다면, 세포리스의 수준 높은 교육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세포리스 문화설’은 발굴 중단과 함께 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갈릴래아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해진 세포리스 세포리스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전 지역의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 조사(1976년)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그뿐 아니라 세포리스는 기원후 2-3세기 유다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1985년부터 이스라엘의 히브리 대학과 미국의 듀크 대학이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발굴을 시도한 워터맨 교수의 해석은 신약 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주로 복음서와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귀족의 저택과 유다교 회당과 로마식 포장 대로가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 세포리스는 기원후 1-3세기에 발전했던 유다교의 중심지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세포리스의 유적은 대부분 신약 시대 직후인 기원후 2-5세기의 회당과 귀족의 저택 등인데, 특히 60여 군데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는 갈릴래아 지역에서 가장 화려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우뚝 솟은 언덕, 수량이 풍부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 비옥한 농경지,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세포리스는 신약 시대 이래 갈릴래아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39년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다 임금으로 임명된 헤로데는 로마군의 도움으로 세포리스를 선점한 후 온 갈릴래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후 기원전 4년에 그가 죽고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왕국의 분봉分封 왕으로 임명됐을 때 세포리스는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정해졌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유다 민족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최고 의회)은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원후 160년대 세포리스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곳은 유다교의 종교적·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유다교에서 ‘성문 토라’인 구약성경과 비교되는 ‘구전 토라’ 탈무드는 <미쉬나>의 해설집인데, 최고 라삐 유다가 <미쉬나>를 최종 편집한 곳이 바로 세포리스였다. * 김성 님은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자 같은 대학 성서고고학 박물관장으로, 성서고고학과 성서지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09년 12월호,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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