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그때 그 자리]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회당은? “회당장의 손자이고 회당장의 아들, 사제이며 회당장인 베테누스의 아들 테오도토스가 율법을 읽고 계명을 가르치기 위한 모임 건물(synagoge)을 지었다. 또 그의 선조들이 장로들과 시몬 가문과 함께 세웠던, 외지에서 온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숙소로서 손님방, 응접실, 급수처도 마련하였다.” (‘테오도토스 비문’) 사람뿐 아니라 돌멩이에도 역사가 있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오늘까지 이어 오는 역사의 의미망을 알고자 한다. 그것을 읽기 위해 땅을 파고, 자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깊이 숙고한다. 카파르나움은 1967년 이전에 대부분 황무지였지만, 오늘날에는 이천여 년의 역사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회당 유적으로, 주변에 흔한 검은 현무암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가장 번듯한 하얀 석회석 건물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회당은 모임인가, 건물인가?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곳은 카파르나움 회당이다. 그분이 거기에서 복음의 빛을 밝히시자, 어둠 속에서 암약하던 더러운 영은 더 머물지 못하고 쫓겨난다(마르 1,21-26 참조). 그분은 회당에 가서 자주 복음을 선포하고 당신을 드러내셨다(마태 4,23; 9,35; 13,54; 마르 1,39; 6,2; 루카 4,15-16.44; 6,6; 13,10; 요한 6,59 참조). 우리는 그 장면을 대할 때 회당(會堂)이라는 말에서 자연스럽게 성당(聖堂) 같은 종교 건물을 연상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예수님 시대에 그런 회당 건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1967년부터 팔레스티나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고대 회당 유적을 50군데 이상 발견하였다. 대부분이 3-6세기 건물로 1세기 특히 예수님 시대의 회당 유적은 극히 드물었다. 나자렛 회당도 없었고 발굴된 카파르나움 회당도 4-5세기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드나들며 복음을 선포하신 회당은 어디에 있을까? 70년 이전의 회당 유적으로 확인된 곳은 골란 고원의 가믈라, 마사다, 헤로디움과 1990년대에 발굴된 예루살렘 서쪽의 키르얏 세페르, 예리코 등 다섯 군데다. 그 가운데 마사다와 헤로디움은 제1차 로마 항쟁 중에 요새에 마련된 헤로데 궁궐의 일부를 회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예리코 회당도 하스모네아 궁궐의 일부를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본래의 회당 건물은 두 개 남는데, 갈릴래아에는 전혀 없다(한때 작은 회당으로 간주되었던 막달라 유적은 현재 샘터로 여긴다. 또 현재 카파르나움 회당 밑에 1세기의 회당 또는 공공 건물이 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팔레스티나 탈무드>는 70년대에 예루살렘에만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그 많던 회당이 왜 흔적도 없는가? 1913-14년에 예루살렘의 다윗 도성 터를 발굴하던 라이문드 웨일은 비문을 하나 발굴하였다. 일명 ‘테오도토스 비문’(록펠러 박물관 소장)이라 부르는 이 자료는 회당을 ‘건물’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래서 이 비문의 연대를 둘러싼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직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70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회당은 바빌론 유배 후에 유다인 거주 지역에서 생겼다고 보나 그 기원과 발전 과정은 아직 분명치 않다. 회당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시나고게(synagoge)’다. 본래 ‘모임’, 특히 ‘종교 집회’를 뜻하던 이 말이 점차 그런 모임이 열리는 곳, 나아가 그런 용도의 건물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아마도 예수님 시대에 회당은 일정한 공공 장소(건물이거나 빈터)에서 행해진 집회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유다 사회는 오늘날처럼 분화되지 않아 회당은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모임, 율법 교육, 주민 회의 등 복잡한 성격을 지녔다. 가령 상태가 좋은 가믈라 유적을 보면 건물 내부의 벽을 따라 긴 의자가 150석 정도 설치되어 있고, 가운데 공간에 100명 정도가 앉거나 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문 수가 적고 공간이 좁아 실내가 매우 어두웠으므로, 등잔을 많이 켜서 모임 장소를 밝혔을 것이다. 즉 당시에는 회당 건물이 특별한 종교성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모임을 갖는 공공 건물로 존재했던 것 같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각지의 회당은 부쩍 늘었고 점차 독자 건물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모자이크나 특정한 상징으로 종교 건물의 특성을 표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카파르나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을까? 즈불룬 지파의 땅 나자렛에서 성장하신 예수님께서 그 땅의 뼈아픈 역사를 모르실 리가 없다. 이스라엘 임금 페카 시대에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갈릴래아와 납탈리 온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2열왕 15,29)던 것이다. 그때 받은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대 고고학은 그 후 육백 년 넘게 그 땅이 폐허로 남았다고 밝힌다. 당대에 그 처참한 비극을 들은 이사야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였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8,23-9,1; 참조 마태 4,15-16). 이사야의 선포 이후 칠백여 년이 지나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폐허를 위로하신”(이사 51,3)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셨으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온 민족이 겪을 외세의 억압과 침략의 피해를 가장 먼저 오랫동안 받은 곳, 그 고난의 땅에 하느님의 복음과 빛을 비추려고 ‘위로(나훔)의 마을’ 카파르나움을 찾지 않으셨을까?(마태 4,13-14 참조) 이사야의 예언처럼, 납탈리 땅에 속하는 그곳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잇는 국제 교역로 “바다로 가는 길(Via Maris)”(마태 4,15; 이사 8,23)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죽음의 무덤에서 부활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었듯, 생명의 복음은 고난의 땅에 먼저 스며든다. 주님을 따라 교회도 끊임없이 생명이 위협받는 이들을 찾아 위로와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칠 오늘의 카파르나움은 어디인가? [성서와 함께, 2010년 5월호, 이용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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