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19,16-30 머리와 가슴, 가깝고도 먼 길 사람의 행복조건에 재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더라도 세상의 재물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욥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던 욥의 불행은 그 재물을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그 재물 자체가 문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그 조건의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재물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에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얼마만큼 조화롭게 다루는지가 사실 중요한 관건입니다. 어린이와 부자 마태오는 19장에서 예수님과 바리사이의 이혼에 대한 논쟁(3-9절)을 다루면서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12절)에 대한 설명을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관련지어 어린이(13-15절), 부자 청년(16-22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23-26절),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데 대한 보상(27-30절)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에서 어린이와 부자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시면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순진한 반면 어른들 기준에 미달되는 버릇없거나 성가신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은 이를 막으며 그 부모들을 꾸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선 아이들은 계산적이지 않고 숨기지 못하고 순진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순진무구한 것과 약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천국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어린이와 연결된 주님의 말씀을 마태오는 이미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이 질문하였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4-5). 여기에서 마태오는 재물에 대해 다루면서 어린이와 상대적인 부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지와 재물 마태오는 아울러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 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래서 마태오는 토라를 잘 알고 있는 유다의 청년에게 지식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이론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우리 교구의 역사적인 성당, 또 성지와 관련되어 일어났던 사건들이 떠오릅니다. 그 성당은 대부분 구교우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그래도 이름이 꽤 알려진 곳입니다. 몇 년 전, 그 지역에서 3선까지 할 정도로 유능한 군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자였는데 그 오래된 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싶어 교구와 협력하여 행정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행정기관에서는 그 지역이 대부분 신자들이라 협조는 당연히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사의 시작 단계에서는 관련된 신자들이 협조적이어서 해결이 잘 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공사 지역에는 한 가정만 거주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외지에서 땅만 사놓고 있거나 임시건물을 지어놓고 주말농장처럼 다녔습니다. 이 사람들이 서서히 비협조적으로 나가면서, 점차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살고 있던 한 가정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웠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교구와 군을 싸잡아 “교회가 행정기관과 짜고 힘없는 약자를 착취한다.”라는 내용의 글을 여기저기 올리며 비방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타당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이 문제였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얻은 전체적인 문제의 씁쓰레한 결론도 역시 재물과 연결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교구가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터무니없는, 그것도 몇 배의 액수를 요구하는 바람에 교구의 재정능력으로도 힘들었고, 또 윤리적인 의무에서도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변호사까지 사서 군을 상대로 대법원 재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도와주려던 군에게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을 주는 꼴이 되어서 교구는 늘 빚을 진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는 교구의 딱한 입장을 전해 듣고 서울의 한 변호사가 신자로서 당연한 도리라며 자진해서 무료 변호를 맡아주었습니다. 지루한 법정 소송이 결국은 군의 승소로 끝났지만 그동안 얽힌 갈등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일이지만 교구청에서 소임을 수행하면서 얻은 교훈은 “돈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익 앞에는 웬만한 신앙을 가지고는 정도(正道)를 지키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비단 우리 교구만이 아니라 성당과 관련된 땅 문제는 다 골머리를 앓고 있고, 무조건 몇 배의 돈을 요구하는 것이 전국의 공통된 일반인심인 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그 아까운 재물과 집까지 포기하라고 하셨나 봅니다. 공교롭게도 이 성당이 문제가 되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같은 시기에 교구의 성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터넷에 교구를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소였다가 성지에 편입된 신자 공동체였는데 최근에서야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 조용하지만, 몇 년 동안 끌어온 성지와 주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참 어려웠습니다. 성지 내에 세웠던 납골당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것인데 처음에는 자신들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납골당 때문에 식수가 오염된다는 명분으로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납골당 건립은 행정상으로 시의 관계부서에 신고만 하면 되었던 것인데, 여러 가지 문제를 붙여서 반대를 하고 검은 깃발과 현수막을 붙여 성지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나중에 납골묘에 대한 반대가 그들의 선입견에서 온 것이고, 건립된 납골당이 환경오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그 명분을 바꾸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속셈은 성지와 납골묘가 그들의 생업에 구체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얼마간의 보상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로 밝혀진 것입니다. 교구 내의 한 본당과 성지에 얽힌 사건이 마무리되고 보니 결국은 돈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의 풍토가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부쩍 돈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신앙에도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그렇게 의좋던 형제들이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유산문제로 법정까지 가는 사태를 벌이고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원수지간이 되는 세상인심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갈 텐데….” 하며 도통한 사람처럼 말하다가도, 성당 담벼락에 맞물린 몇 평 땅 때문에 성당에 대고 삿대질을 하다가 종래는 냉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 말하면 뭐하겠어요? 피정이다, 사순절이다 해서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뭐가 그렇게 지저분한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논리정연한데 막상 재물을 갖게 되면 욕심이 생기고 그것에 씌워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일 첫 조건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성경의 가르침을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이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그는 슬픈 표정을 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가 떠나자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세상 사람들이 제일 빠져들기 쉽고 그 세력에서 허덕이며 자유도 빼앗기는 곳이 재물의 수렁입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뇌물’, ‘부정축재’ 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 그 예일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친척 사이라도 그 틈바구니마다 재물과 관련되어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재물에 대해서는 형제도 남이다.” 하는 말이 맞기는 맞나봅니다. 새김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주님의 뜻인 것 같아도, 사실은 이 세상의 족쇄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재물이 고이면 부패하고 문제를 일으키니 그 재물을 자꾸 없애야 하겠지요. 뜻깊게 버리고 자유롭게 되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웃과, 더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베푸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루카 복음에는 다른 복음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라자로와 부자’ 이야기입니다(16,19-31 참조). 이를 통해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라자로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았지만, 재물의 안락함에 취해서 라자로의 아픔과 고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재물도 다 하느님 것인데, 인간이 마치 자기 소유인양 착각하고 그 재물을 움켜쥐고 있을 때 일은 벌어지지요. 하느님의 재물을 하느님께 다시 내어놓듯 이웃과 나누어 쓴다면,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그 삶은 기쁨과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유욕에서 재물욕은 인간과 가장 밀접해서 떼어내기가 힘들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정도로 어렵게 되지만, 하느님 것으로, 또 그분이 사랑하는 이웃의 것으로 돌리고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나눔이 비록 밥 한술, 물 한 그릇, 옷가지 하나,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일지라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 나눔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젊은 유다인 청년처럼 머리로는 성경을 꿰뚫고 있어도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기가 그다지도 어려운 것을 보면, ‘낙타와 바늘귀’가 아니더라도 머리와 가슴은 그냥은 가깝지만 실제로는 먼 거리인가 봅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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