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물] 큰 사기꾼 라반 “야곱 이 사기꾼 같은 놈 도대체 어디 있어 이놈을 잡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도둑질해…. 이놈 어디 숨은 거야!” 가뜩이나 벌건 에사오의 얼굴이 화가 나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태세다. 하루 종일 에사오는 야곱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버린 야곱은 어디로 갔을까? 에사오의 눈에 띄는 날에는 그야말로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로 피신을 했다. 라반의 농장으로 급하게 도망가는 길에 야곱은 심정이 어떠했을까? “바보 같은 에사오 자기가 바보 같아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주제에 왜 화를 내고 그래…. 삼촌 집에서 조금 지내다보면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 어쨌든 에사오 성질에 지금 걸리면 나를 죽이려 들거야.”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일이 잘못되거나 실패하게 되면 대개 원인을 자신보다는 밖에서 찾으려는 심리가 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야곱은 이름 뜻 그대로 ‘사기꾼’의 삶을 산 영리하고 죄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머리에 의지해서 모사꾼 사기꾼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꾀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던가?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게 마련이다. 사기꾼 모사꾼의 전형으로 보이는 야곱도 사기를 당한다. 야곱에게 사기를 친 사람은 다름 아닌 삼촌 라반이었다. 라반에게 있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허겁지겁 자신의 집으로 피난 온 조카 야곱은 덩굴째 굴러 들어온 호박인 셈이었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데 건강하고 머리 좋은 청년 야곱의 등장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라반은 야곱을 자신의 집에 오래 붙들어 둘 계략을 꾸민다. 다행히 야곱이 자신의 막내딸 라헬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라반은 드디어 젊고 패기만만한 마치 들고양이 같은 야곱에게 덫을 놓는다. “이보게 조카 이 적적한 곳에 자네가 와 있으니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 르네. 웬만하면 자네가 오래 이곳에서 지내면 좋겠구먼. 그리고 말이야. 내 딸들 이 아직 짝을 못 찾았는데 내 막내딸 라헬과 자네가 결혼을 했으면 하고 생각 해. 라헬도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자네만 좋으면 결혼식을 올리자구….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니고 7년만 자네가 내 일을 도와주게나. 어떻게 하겠나?” 야곱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타향에서 적적한데 자신이 첫눈에 반한 라헬과 결혼할 수 있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삼촌 7년이 아닌 그 이상이라도 라헬과 결혼할 수 있으면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뭐.” 당시 근동의 많은 부족은 결혼 상대자로 친척을 선호하는 관습이 있었다. 지 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시의 남자들은 친척과 결혼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그런데 남자는 신부를 위해 지참금을 지급해야 했다.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신부측 아버지에게 남자는 돈 가축 보석 등으로 보상을 했다. 또 남자의 능력이 되지 않으면 노동으로 갚을 수 있었다. 라반이 야곱에게 제시한 7년간의 노력봉사는 당연한 처사였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는다는 기쁨에 인고의 세월 7년을 견디었다. 드디어 삼촌 라반과 약속한 7년이 지났다. 그런데 라반이 야곱에게 큰 사기를 쳤다. 신부를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야곱은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고 난 후 아침에 아연실색했다. 자신과 결혼을 한 여자는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다. 야곱의 실망과 분노는 상상만 해도 짐작할 수 있다. 씩씩거리는 야곱에게 라반은 다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다. “여보게 미안하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네 풍습은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갈 수 없지 않나. 그래서 부득이하게 레아를 먼저 결혼시킨 것이네. 자네가 7년만 더 봉사하면 그땐 라헬을 주겠네. 그렇게 하겠나?” 라반은 애초부터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야곱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라반은 야곱을 분명히 속였지만 자기 합리화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 같다. 딸을 미끼로 해서 14년이나 야곱을 머슴처럼 부릴 수 있는 훌륭한 계략이었다. “네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살려준 게 누구인데…. 딸을 둘이나 주겠다는데 그 정도도 못하겠나….” 라반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재물이었다. 재물을 늘릴 수만 있으면 모든 계략과 속임수는 다 동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기꾼의 대명사인 야곱을 사기친 라반 그는 분명히 한 수 위의 사기꾼(?)이었다. [평화신문, 1999년 8월 1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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