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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피해의식 속에 살았던 에사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4 조회수3,579 추천수1

[성서의 인물] 피해의식 속에 살았던 에사오

 

 

사람들은 구약성서에서 에사오와 야곱 형제가 20년만에 만나 다시 화해하는 극적인 장면을 가장 아름답다고들 이야기한다.

 

쌍둥이 형제인 에사오와 야곱은 출생뿐만 아니라 성장하면서도 늘 갈등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형제이면서도 오랫동안 원수처럼 미움과 반목의 세월을 지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아버지 이삭은 형 에사오를 더 사랑했지만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더 아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한 뒤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졌다.

 

에사오는 야곱에 대해서 늘 경쟁심리를 가졌을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공공연한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 야곱에게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다. 또 에사오는 머리가 비상하고 명석한 야곱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장자권을 잔꾀를 부려 탈취한 동생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고 늘 피해의식에 시달렸을 것이다.

 

20년만에 다시 동생 야곱을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쉽게 야곱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에사오는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야곱에게 달려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증오와 미움이 다시 에사오의 마음을 자극하지는 않았을까. 차라리 남이라면 더 좋았을 것을 피를 나눈 형제에게 당한 에사오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갈 때의 에사오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다. 에사오는 다혈질적이고 급한 성격이었지만 속마음은 몹시 여리고 정이 많았던 것 같다. 엎드려 절하는 야곱의 힘없는 모습을 보자 에사오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두 형제는 서로 입을 맞추며 눈물의 포옹을 했다. 야곱은 형 에사오의 용서하는 마음에 감동을 했다.

 

“형님이 저를 이렇게 사랑으로 대해주시니 형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느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는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에사오는 동생 야곱과 다시 만나 화해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쉽게 예전처 럼 회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용서한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에사오는 야곱에게 자신이 앞장서서 가겠다고 자청했다.

 

“자 내가 앞장서마.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자 야곱은 어린것들을 핑계삼아 거절했다. 에사오가 동생보다 앞장을 서서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을까. 에사오는 야곱의 잔꾀와 비상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동생 야곱에게 기만당한 삶을 살아온 터였기에 에사오는 야곱을 자신의 밑에 묶어두려는 생각을 가졌음직하다. 그런 에사오의 의도를 알고 야곱은 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자 에사오는 야곱에게 다시 제안을 했다.

 

“내 부하 몇 명을 남기고 갈까?”

 

그러나 야곱은 기어이 사양했다.

 

“형님 생각이야 고맙기 그지없지만 그렇게 하실 것은 없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에사오가 자신의 부하를 몇 명 야곱에게 딸려주겠다는 제안도 야곱에 대한 배려일 수 있으나 정반대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에사오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갈 수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다. 형의 속셈을 알고 있는 야곱은 두 번째 제안도 거절했다. 이는 야곱이 에사오보다 한 수 위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사오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야곱 때문에 손해를 보았으며 심리적으로도 야곱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았다.

 

인간의 본성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화되지 못한다. 더욱이 멀어진 인간관계가 이전처럼 다시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두 형제는 화해의 만남 이후에도 각자의 삶을 살았다.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형제지간도 아니었다.

 

에사오는 믿었던 동생에게 받은 배반과 상처로 거의 평생을 동생에 대한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상처를 주는 대상이 부모나 가족이나 형제인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지만 때로는 가장 먼 관계가 되기도 한다. 가까운 관계는 그만큼 상처도 깊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하는 쪽은 늘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란 생각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평화신문, 1999년 10월 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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