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물] 걸려 넘어진 예언자 발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요르단 건너편 모압 평야에 진을 쳤다. 모압왕인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너무 많아 겁에 질렸다. “아니 이스라엘 놈들이 왜 저렇게 많은거야. 저놈들이 소가 풀을 뜯어먹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을 모두 삼켜버릴 태세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궁리를 하다가 사신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오게 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라는 떼거지들이 지금 우리 나라 국경까지 접근해오고 있소. 나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으니 당신이 와서 저놈들을 저주해 주시오. 당신이 복을 빌어주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는 줄 잘 알고 있소. 부디 도와주시오….” 발람은 분명히 당대의 유명한 종교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발람이 쉽게 초대에 응하지 않자 발락의 부하들은 몸이 달았다. “무슨 요구든지 다 들어줄테니 우리 임금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나 발람은 쉽게 응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셨기 때문이다. 모압인들의 초청이 끈질기게 계속되자 발람은 모압 고관들을 따라 나섰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갈 길을 막는다(민수 22―24장). 야훼의 천사가 발람에게 나타났다. “너는 지금 아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막아선 것이다.” 그러자 발람은 천사에게 “그러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의 눈에 거슬리는 길이라면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구 말구요. 천사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발람은 모압왕인 발락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다. 모압의 모든 고관들이 있는 곳에서 그는 푸념하듯이 읊었다. “모압왕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저주하지 않는 자를 내가 저주하랴. 아! 저 민족을 보니 만방에 견줄 데 없는 대단한 민족이로다. 이스라엘은 먼지 같아 셀 수도 없구나! 내 여생도 그들과 같았으면….” 그러자 곁에 있던 발락이 화를 내며 발람에게 투덜거렸다. “아니 웬일이야? 원수들을 저주해 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복을 빌어주다니? 당신 미쳤어?” 그러자 발람도 되받아쳤다. “아니 내가 예언자인데 야훼께서 내 입에 담아 주신 말씀을 해야지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발락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은 터가 안 좋아. 다른 곳으로 갑시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장소를 옮겼지만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다. 발락은 드디어 폭발했다. “야 이놈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내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돈을 들여 너를 데려왔지. 그들을 축복해 달라고 데려 왔느냐? 당장 네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그전에 약속한 돈을 줄 수 없다.” 그러자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부패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다른 방법이 있지요. 그들은 광야에서 굶주려 있으니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고 예쁜 모압 여자로 하여금 음란한 짓을 하게 하면 그들은 죄를 짓게 됩니다.”(묵시 2,14 참조) 발람이 발락을 사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짓게 하여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이 일로 인해 발람도 결국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분명히 발람의 생애 초기는 다른 예언자 못지않게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다. 여러 번의 유혹도 잘 극복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마지막에 타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발람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걸려 넘어 졌다. 그에게도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이 좋아야 다 좋다”는 외국 격언이 있다. 아무리 인생이 화려하고 빛나도 마지막 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끝까지 마음의 고삐를 쥐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겸손한 삶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방심과 타락은 순간에 오고 그 대가는 너무 혹독하다. 발람은 오히려 자신의 탁월한 재주와 능력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그것도 자신의 인 생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라는 말처럼 마지막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삶을 희망해본다. [평화신문, 2000년 1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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