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2) 새로운 도전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그분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의미할까?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뒤따라 산다는 것은 그분의 비전(vision), 그분의 정신, 그분의 가치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마디로 예수 살이이다. 예수 살이, 즉 예수님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님은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 유다인이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가르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그것의 분명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은 당시 유다인들의 사회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을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당시 유다인들은 어떻게 이해하였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르 1,15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단지 세상 종말이 다가왔다는 말씀으로 이해하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이즘은 구약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유다인 예수님도 구약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고 계셨다. 동시에 그분은 놀라운 새로움(newness)을 가지고 계셨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에서의 하느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사실 바빌론 유배 이전에는 하느님 통치의 현재적 차원이 강조되었다면, 유배 이후에는 그것의 미래적 차원이 부각되었다. 어쨌든 이것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그 어떤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그분이 통치하신다는 사실(fact)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원후 38년경에 태어나 100년경에 죽은 유다인 역사가였다. 요세푸스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 제13년, 즉 93-94년에 『유다 고대사』라는 작품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제1차 유다 봉기(기원후 66-70년)의 발발까지를 서술하는 방대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원후 6년에 일어난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반란에 대해 서술한다. 이 반란자들은 “하느님만이 주인이시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폭넓게 퍼져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 로마제국의 꼭두각시인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통치하였다. 결국 많은 유다인들은 이러한 로마 황제와 헤로데 가문의 통치를 받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날을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와 헤로데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는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였다. 즉 기존의 현존하는 질서가 아닌 전혀 새로운 질서 말이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느님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가리켰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당시 유다이즘의 종교적 체제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 새로운 가치를 의미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당시 유다인들에게 하나의 도전(challenge)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의한 인간의 사고방식, 가치관, 행동 양식뿐 아니라 사회적 체제와 구조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 도전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하나의 초대였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도록 초대하신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요구하시는 초대 앞에서 우리의 태도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이와 같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가르침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도전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태도를 정해야 할 그런 하나의 도전이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나 무시간적이고 비역사적인 용어가 결코 아니다. 비록 그것이 미래에로, 종말에로 열려져 있지만,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바로 현재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와 가치인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실천하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에게 있어 독창적인 새로움은 그 하느님 나라가 당신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 즉 새로운 질서와 가치는 이미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운동이었다. 그분은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실천하셨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일은 하나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은 바로 하느님 나라 운동인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vision)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리는 그분의 비유 말씀이다. 우리는 마태 13,31-33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읽어보자.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다. 그러나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룩처럼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결과를 거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작고 감추어져 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실제(reality)이다. 작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새로운 질서와 가치에로의 초대이다. 그것은 비록 작고 감추어져 있지만, 이미 현존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 초대 앞에 서 있다. 작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에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고 그 현존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이다. “다시 새롭게”,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도전이다. [월간빛, 2011년 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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