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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18: 코린토 교회가 세워지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11 조회수3,882 추천수1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18) 코린토 교회가 세워지다


코린토에 18개월 머물며 담대히 복음 전파

 

 

작가노트 : 부유한 대상인으로 성장한 코린토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도들을 더더욱 박해하게 된다. 어느날 밤 환영으로 나타나 바오로에게 큰 용기를 주는 주님, 그리고 코린토 교회를 매우 사랑했던 사도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교하는 모습을 그렸다.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아테네는 자신들의 교양과 빛나는 역사에 대해 크나큰 자긍심을 갖고 있어 그리스도 신앙의 전파를 위한 구심점이 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로 향했다. 그 시절 코린토는 그 지정학적 위치 덕에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항구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했고, 로마제국 동부와 서부 지역을 긴밀히 연결했다. 로마 원로원 대표가 그리스 코린토에서 지방총독으로 봉직할 정도였다. 바오로는 코린토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곧 항구에서 주위 섬들로, 나아가 모든 지역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퍼져나갈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천막 만드는 아퀼라 부부 만나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코린토에 이르는 80㎞를 육로로 갔는지, 아니면 더 빠른 해로를 택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후자라면 피레아 항구에서 코린토 운하로 곧바로 가는 배를 타고 가서 켕크레애 항구에서 내렸을 것이다.

 

사로니코에 있는 이 항구는 코린토 만에 있는 레카온 항구로 하나의 예인망으로 연결돼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100년 전 상품을 실은 배들을 코린토 운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설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부분의 작은 배들은 펠로폰네소스의 파도 치는 대양을 피하게 됐을 뿐 아니라 한 바다에서 다른 바다로 이어지는 여행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바오로가 코린토로 들어가 천막제조업자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났을 때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었던 부부는 바오로에 앞서 로마에서 코린토로 왔다.

 

부부는 자신의 집에 바오로를 유숙시키고 자신의 천막제조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그것은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에게도 특별한 축복이었다.

 

이렇게 코린토의 유일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믿음 전파를 위해 마지막까지 함께 작업했다. 아퀼라는 폰토스 출신이고, 프리스킬라는 로마 출신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로마황제 클라디우스는 주후 49년 칙령을 내려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퀼라는 프리스킬라를 데리고 코린토에 정착했다. 이처럼 코린토 히브리 정착촌에는 로마에서 온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전과 다름없이 회당에서 그의 사업을 시작했다. 예언서에 의거해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완수됨을 설교하고 그들이 설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부유한 대상인들인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던 위대한 메시아가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그 다음 안식일에 바오로가 예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뒤집어 엎으며 소동을 벌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불경한 언사를 내뱉었다.

 

 

티티우스의 집에서 첫 교회 모임

 

바오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면전에서 하느님이신 주님의 성스러운 이름을 공격하는 것을 듣고 있을 수 없어 분노하며 그들에게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사도 18, 6)하고 말했다.

 

바오로가 회당에서 나오자 티티우스 유스투스가 그 앞에 나타나 회당 옆에 있는 자신의 집을 교회 모임을 위해 제공했다. 바오로는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를 따라 티티우스의 집에 모였으며, 그곳에서 바오로는 세례성사를 주기 위해 교리문답을 체계화했다.

 

코린토에 있는 첫 교회는 주로 전에 우상숭배자였던 이들과 몇몇 유다인들이 설립했다. 세례 교인들 중에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크리스포스는 후에 에기나섬의 첫 번째 주교로 수품했다.

 

코린토 히브리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자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주님은 바오로가 담대하게 대적하도록 투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어느 날 밤 환영으로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 18,9-10).

 

이러한 주님의 확증은 바오로에게 큰 용기를 줬다. 신자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찬양과 함께 외쳤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나는 두렵지 않네"(시편 118,6). 그리고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실제로 주님은 앞서 우리가 말했듯이 히브리인들이 그를 갈리오노스 총독의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갔을 때 모든 죄목에서 그를 벗어나게 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테살로니카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서한을 보내 그들이 당하는 박해에 강력히 대항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테살로니카에서 갑자기 추방당하면서 그들과 미처 논의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그들에게 명료하게 알려줬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은 후에 신약성경에 포함됐고, 신약성경 27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편지

 

바오로는 동료인 실라스, 티모테오와 함께 18개월 동안 일을 했고, 코린토 시내뿐 아니라 아카이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교를 했다. 그것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 나타나며, 아카이아 교회에 인사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2코린 1,1 참조) 특별히 코린토 항구인 켕크레애에 있는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했으므로 포이베 봉사자에게 부제품(Deacon, 정교회에서는 보제품)을 줬음을 성경에서 알 수 있다.(로마 16,1)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를 매우 사랑했으며 당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도록, 그리고 정신적으로 교회를 강화시키고자 항상 돌봤다. 신약성경에 포함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이라는 두 편의 긴 서한이 그것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세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코린토를 두 번째로 방문한 것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는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염려돼 코린토를 떠나기로 했다. 코린토 교회는 적임자들인 사제들로 잘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린토를 떠나며 바오로는 자신의 협력자들을 함께 데리고 떠났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를 자신의 장래 선교활동을 예비하도록 소아시아 에페소에 거처하게 했다. 그리고 그곳 회당에서 설교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에페소로 곧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위대한 사도의 두 번째 선교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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