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19) 제3차 선교여행
소아시아 에페소에 융성한 교회 꽃피우다 - 작가노트 = 바오로 사도의 제3차 선교여행지인 에페소인들은 사냥의 신인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했다. 그래서 우선 아르테미스 여신의 거대한 신상과 에페소의 인상을 표현해봤다. 그리고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 융성한 교회를 세우기를 간절히 원했던 바오로 사도를 떠올리며,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의 하나인 페르가몬의 인상과 일곱 개의 별들로 이뤄진 화관과도 같은 일곱 교회의 빛을 나타냈다. 폐허 속에 빛나던 어둠과 빛 속에서 드러나는 페르가몬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기나긴 2차 선교여행의 노독에 지친 바오로 사도는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아직도 그를 힘들게 하는 몇몇 문제를 안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스도 형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게 돼 그는 참으로 기뻤다. 그러나 바오로는 거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설립한 교회에서 유다인들이 말썽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제보들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새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다시 에페소로 가겠다는 약속도 지켜야 했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자마자 주후 53년 봄,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중심지 목적지는 에페소였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바오로는 남부 갈라티아 교회들을 방문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그가 매우 사랑했고 후원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었다. 데르베에는 그해 6월께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수행원으로 데르베 출신 가이오스를 합류시켰다. 그는 바오로의 새로운 제자로 합세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모금활동으로 '로기아(collection)'를 결성했다. 그는 그 지역 다른 교회들을 방문했으므로 프리기아를 거쳐 에페소에 도착했다. 에페소는 에게해 연안에 있는 아주 오래된 도시다. 아마존 여족(女族)이 세웠고, 그들은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했다. 바오로 시대까지도 그곳에는 소아시아에 있는 우상숭배의 가장 큰 중심지였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거대한 상과 대리석 신전은 수많은 참배객을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신전 주위에는 아르테미스 여신과 다른 신들의 신상을 제조하는 공장들이 세워져 성행하고 있었다. 동시에 에페소는 동방의 가장 큰 상업중심지로서, 그리고 지방총독이 있는 소아시아 행정수도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소아시아 에페소는 500개 도시와 농촌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습니다"(1코린 16,9)라고 적고 있다. 지금까지 선교활동을 펼친 어디에서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처럼 풍성하고 거대한 선교의 장을 만난 적이 없었다. 선교는 유다 회당에서 시작됐다. 유다 극단주의자들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사도는 집에서 교리문답을 계속했다. 교인들 수가 늘어났고 가장 넓은 집에서조차도 자리가 부족하게 됐을 때 그는 선교 중심지를 티란노스라고 불리던 학교로 옮겼다. 아마도 티란노스는 새로운 교인들 중 한 사람이 감사 표시로 자신의 학교의 큰 교실을 빌려줬거나 기증해 바오로 사도가 가르칠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후 61년에 로마 감옥에서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에페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사랑이 성장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도는 주님께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기도 중에 항상 그들을 기억했다.(에페 1,15-16 참조) 요한묵시록 일곱 교회 번창 바오로는 많은 협력자들과 함께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융성하게 교회가 설립되기를 열렬히 원했다.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된 스미르나, 에페소, 라오디케이아, 필라델피아, 사르디스, 티아티라, 페르가몬과 같은 교회였다. 이들 일곱 개 지역교회들은 일곱 개 별들로 된 화관처럼 에페소 모교회에 화관을 씌워줬다. 바오로는 로마에서 편지를 보내며 기쁨에 넘쳤을 것이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8-9). 교회는 매우 성장했고, 각 도시마다 성체성사를 주관할 책임자들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원로들을 주교 명칭으로 서품했다.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 하느님의 교회를 사목하기 위해서였다. 에페소에 머무르던 거의 3년 동안 많은 시간을 이들 원로들 교육과 조직을 위해 할애해야 했다.(사도 20,28-31 참조) 이렇게 한 뒤 사도가 에페소를 떠났을 때에는 이들 원로들이 사목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갈라티아 교회들에서 바오로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히브리 사람들이 바오로를 적대해 중상모략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으니 진정한 사도가 아니며,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를 비난했던 것이다. 진정한 이유는 사람들이 할례가 모세 율법의 계명과 분리될 수 없고, 전에 우상숭배자였던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을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고집했던 것이다. 이것은 갈라티아 그리스도인들을 교란시켰다. 만일 이러한 견해들이 널리 퍼졌다면, 그리스도교회는 유다교 이단이 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모든 유다식 교리에 대응하는 서한으로 신약성경에 포함된 그 유명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보낸 것이다. 에페소에서 바오로가 직면하게 된 또 하나의 문제는 마법이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힘으로 행했던 놀라운 기적들로 인해 마법에 종사하던 사람들 다수가 그에게 와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죄를 고백했다. 많은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법서를 가져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태웠다. 이 책들은 5만 은화(영국 금화 1600 파운드에 해당)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 사도, 에페소에 잠들다 바오로 사도의 이같은 큰 성공은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마법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던 사람들이 사도를 대적해 들고 일어나게 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맹수와 싸웠다"(1코린 15,32)고 말했으며, 로마서는 에페소에서 프리스카가 아퀼라와 함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로마 16,3-4)라고 전한다. 사도행전은 에페소 신전들 신상과 아르테미스 신상 제조자들이 야기한 소동 외에는 에페소에서 바오로가 겪은 위험들을 분명하게 적어 놓지 않았다. 바오로가 군중들에게 도시 수호자인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설득했다는 죄목으로 온 도시가 들고 일어났다. 많은 백성들이 대극장으로 모여 들었고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라고 외쳤다(사도 19,28-30 참조). 바오로는 극장으로 가 그들에게 말하고자 했으나, 평소 바오로에게 호의를 가졌던 그 도시 귀족들 중 몇몇은 성난 군중 앞에 나타나지 말도록 충고했다. 소요가 끝났을 때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언제나처럼 성 만찬을 거행했고, 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충고의 말을 남기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주후 70년 7월 9일, 로마 장군 티토가 4개 군단 8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후 신학자 요한 사도가 에페소로 일을 하러 왔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복음서와 13편에 이르는 서한들을 썼으며, 매우 연로해 평안히 눈을 감았다. 그의 무덤이 있는 장소에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성 요한을 추모하는 웅장한 성당을 지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성당의 잔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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