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탈출기 -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다 “회당 벽에는 무슨 글인지가 히브리어로 적혀 있었다. 나는 볼펜을 꺼내 들고 수첩에다가 그 글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한 유대인 남자가 손에 기도서를 든 채 급히 내게 다가온다. 그는 민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거룩한 날입니다. 이 날에 우리는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이방인에게도 적용됩니다’라고 내 귀에다 속삭인다.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필기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적는 일이 그들에게는 노동에 해당한다는 것을”(민영진, 《이스라엘 이야기》, 컨콜디아사, 121쪽). 20,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고대 셈족은 한 대상의 본질과 정체성이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고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도 그분의 현존 또는 실재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경외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초기 유다교에서는 이런 태도가 강화되어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이름을 내 속셈과 편견의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 그분의 이름을 마법 주문처럼 외우며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고대에서 ‘쉼’(휴식)은 신들만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쁜 농경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주기적으로 쉬며, 더구나 종과 집짐승까지 쉬게 한다는 것은 무척 파격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자유를 모든 사람과 동물이 평등하게 누리게 하려는 야훼 신앙의 특성에서 연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면서 각종 규정으로 변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쉬려면 짐을 날라서는 안 되는데, 이와 연관하여 ‘짐이 무엇이냐?’ 하고 짐의 성격을 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업거나 안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아이는 짐이 아니므로 업거나 안아도 괜찮지만, 만약 아이가 짐을 들고 있다면 어찌 되느냐?’ 초기 유다교 율법 학자들은 이런 규정을 놓고 안식일 법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본질을 놓치고 시행 세칙을 만들어 정신이 형식에 얽매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고 말씀하십니다. 20,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재물과 소유권의 가치를 무척 강조하여 자본의 힘이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을 철저히 상대화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시편 24,1).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생명과 자유를 누리도록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고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그런 면에서 이 계명의 초점은 부자의 소유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는 오늘날 불공정한 임금과 심각한 양극화 현상, 에너지 낭비 등을 함께 생각하며 이 계명을 성찰해야 합니다. 20,2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하늘에서 너희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21,1 “이것이 네가 그들 앞에 세워 놓아야 할 법이다.’” 이제 모세는 계약과 율법의 중재자로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직접 이르신 십계명 외의 나머지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해지지만, 똑같이 시나이 계약에 속한다고 강조됩니다. 인간이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려면 법이 필요합니다. 20장에 소개된 십계명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 원리이지, 생활의 세부 규정을 담은 일상생활의 법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탈출기 20,22-23,33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부 규정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이 부분을 ‘계약의 책’이라 부르는 이유는 24,7의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 주었다”에서 기인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여러 법이 수집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가다”(22,1), “어떤 사람이 밭이나 포도원에서 풀을 뜯기던 가축을 풀어 놓아 남의 밭 곡식을 뜯어 먹게 하였을 경우”(22,4) 등을 보면, 소규모 농업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정착 생활을 시작한 후에 만들어진 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뒤 왕정 시대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이어 시나이 광야에서 공포된 법으로 소개하는 데에는, 시나이 계약의 맥락에 다양한 법규를 넣어 그 기원을 설명하고 권위를 부여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24 내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하게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너희에게 강복하겠다.’” 야훼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법을 일러 주십니다. 이 첫 말씀은 계약 법전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성결 법전과 신명기 법전의 첫머리 역시 야훼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어디든지 가서’와 같은 표현을 통해, 누구나 쉽게 제단을 세우고 이용할 수 있는(초기 단계) 고대의 규정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계약 법전에 나타나는 율법은 오랜 기간에 걸쳐 다른 유형의 율법과 혼합되어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훼의 이름을 두신 곳’이 예루살렘 한 곳으로 확정된 때는 신명기 규정 이후니까요. 계약 법전에서 제단에 관한 법 다음에 이어지는 법조문은 문체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21,2-22,16)은 “만약 ~할 경우”로 시작하며, 3인칭으로 표현된 ‘법규’(미쉬파팀mishpatim 24,3)입니다. 이 법규는 조건법이나 사례법으로 “너희가 히브리인을 종으로 샀을 경우”(21,2)처럼 ‘~되었을 경우(할 때)에는 ~해야 한다’는 식으로 조건절과 결과절로 구성됩니다. 먼저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제되고 뒤이어 법률적 제재가 나오는 형식입니다. 이런 양식은 공동체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중재나 관습이 구전되면서 민간에서 분쟁 해결책으로 쓰이다가 나중에 공식 법규로 정해졌다고 봅니다. [성서와함께, 2010년 1월호, 배미향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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