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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룻기: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6 조회수3,795 추천수1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룻기 -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탈출 22,21-22). ‘과부’와 ‘고아’는 하느님께서 직접 보호하십니다. 시편 68,6에는 그것과 관련된 기원祈願을 볼 수 있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거처에 계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는 법률적 ‘변호인(고엘)’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의 후견인으로 등장하십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과부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들이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1티모 5,3-16 참조).

 

1,1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룻기는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라고 시작합니다. 룻기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암흑기였던 판관 시대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샛별처럼 룻의 효행이나 희생적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룻기를 영성이 담긴 문학 작품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구세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룻기는 판관기와 사무엘기 사이에 놓여 있어 마치 척추 사이에 끼어 있는 연골 같은 역할을 합니다. 판관기는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판관 21,25)고 끝을 맺고, 룻기는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룻 4,22)고 끝을 맺습니다. 임금이 없던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임금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리고 사무엘기에서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1사무 16,1)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룻기의 핵심 주제가 이런 구세사의 맥락에 있음을 기억하며 룻기를 읽습니다.

 

1,20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룻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만, 전개되는 상황에는 공상이 아니라 삶의 실제 문제, 그리고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억압당하는 과부들의 처지와 투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경 시대에 독립된 여성이라는 관념은 전혀 받아들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성은 항상 종속된 존재로 과부가 되면 그 아들에게 의지했습니다. 만일 자식이 없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세 38,11; 레위 22,13 참조). 그러나 자식도 시아버지도 없으면 어떠한 재산을 소유할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몇 배나 불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세 과부는 이러한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나오미’(‘은총, 은혜로움, 기쁨, 즐거움, 아름다움’이란 뜻)라는 여인은 베들레헴에 기근이 닥치고 생계가 곤란해지자, 남편을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 이국땅 모압 지역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운명이 가족에게 들이닥쳐,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은 죽고 맙니다. 남은 두 아들의 이름에서 벌써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흘론으로 ‘질병’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킬욘으로 ‘허약함’을 뜻합니다. 모압의 두 여인과 결혼한 다음, 두 아들도 모두 죽고 맙니다. 어머니와 아내들을 과부로 남겨둔 채 말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며느리들에게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으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합니다. 나오미의 권유에 못 이긴 오르파(얼굴을 돌릴 때의 ‘목덜미’를 뜻함)는 편안한 쪽을 택하여 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1,16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반면에 룻은 나오미와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룻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보다’에서 어원을 찾는 사람도 있고, ‘다시 채우다’라는 말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 한편, 어떤 이는 ‘동료, 친구(르웃)’라는 말의 축약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제안은 룻이라는 말이 ‘물이 넉넉히 차다’(물을 ‘다시 채우다’)는 동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이 넉넉함’을 은유하는데, 예언자들이 백성에게 주님의 복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룻은 계약을 지키듯 시어머니에게 충실하겠다고 다짐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두 여인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큰 힘이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심한 동기는 ‘사랑’입니다. 룻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곤경에 처해 죽을 도리밖에 없는 사람, 즉 ‘마라’로 이름을 바꾼 시어머니를 선택합니다. “오직 죽음만이 저와 어머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룻 1,17)는 룻의 투신은 일상생활을 함께하면서 서서히 다져지는 열망입니다. 함께 길을 걸으면서 함께 슬픔과 기쁨을 겪는 실제 삶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고, 룻 역시 자신이 전에 가졌던 민족적이고 종교적 신앙이나 자신의 행복보다 나오미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인간관계에서 키워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앙숙으로 여겨지는 고부간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나, 경쟁 의식을 지닌 여성들 사이에서 갖는 선입관을 넘어 진정한 우정과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고 증거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아름다운 동행의 모델이 아닐까요?

 

[성서와함께, 2011년 7월호, 김연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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