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8,1-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 수도원 체험이라는 피정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피정에 오는 젊은이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여러 질문 가운데 하나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세요?”, “얼마나 기도하세요?”이다. 아마도 새벽에 시작하는 성무일도, 성경 낭독, 묵상, 미사로 이어지는 짧지 않은 시간들이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그 피정에 오고 있다. ‘조금이나마 기도의 맛을 느껴서이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일반적으로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대화는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화하며 바쁘게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응답은 때론 너무 느리고, 오랫동안 침묵하시며, 우리 기도를 듣지도 않으시는 것 같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18,1)는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는 ‘나’를 위한 시간에는 많은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 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삶에로 돌아서야 하지 않을까! 기도의 항구성 예수님은 루카 복음 17,22-37에서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다음, 18장 시작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 어떤 박해가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이겨낼 것을 강조하신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며,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인내력을 갖고 성실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루카 복음 11,5-8의 ‘성가시게 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서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간청해야 함을 강조하신다.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의로운 판결과 사람의 아들의 오심(18,8)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초점은 불의한 재판관이라기보다 그 재판관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는 가난한 과부에게 있다.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재판관의 반응 재판관과 과부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재판관은 중요한 윤리적 책임을 지니고 높은 사회적 지위도 갖고 있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2절)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뿐 아니라 어느 날 있게 될 하느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으며, 이웃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자만심 강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런 재판관에게 끊임없이 찾아가는 한 과부가 있었다. 성경 안에서 과부는 고아와 외국인과 함께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약하고 소외된 계층에 속한 이들로서, 재판관은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특별히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 과부는 재판관에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3절) 하며 매달린다. ‘적대자’라 함은 과부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을 말하며,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이란 적대자에게 어떤 처벌이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닌 침해받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과부이기에 재판관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이른바 ‘있는 사람’이나 ‘잘나가는 사람’이라면 재판관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도와주었을 것이다. 결국 가난이라는 것이 과부와 그녀의 간청마저 관심을 받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재판관의 냉대에도 과부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그 누구에게 간청할 이도 없을뿐더러, 재판관만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비유 안에서 과부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재판관은 하느님을 상징한다. 어느 순간에 재판관은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무엇이 재판관으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일까? 갑자기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진 것일까? 아니면 불쌍한 과부에게 연민의 정이 들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올바른 판결을 해야 하는 재판관의 직무에 대한 올바른 자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5절). 언제부턴가 그는 과부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함을 느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과부의 간청이 귀찮기도 했지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가 점점 더 괴롭게 다가온 것이다. 과부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사 ‘괴롭힐 것이다’(υποπιαζω)는 ‘눈 밑을 치다.’, ‘얼굴을 치다.’, ‘정면으로 대들다.’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단련하다.’, ‘녹초로 만들다.’, ‘지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과부의 계속되는 간청은 재판관을 귀찮게 하고 지치게 하여 녹초로 만들 것임을 알기에 재판관은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올바른 판결을 내릴 것을 결심한다.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잘 알아들으라고 하시며(6절)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은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7절)고 말씀하신다. ‘선택된 이들’(신명 4,37; 10,15; 14,2)은 고통 안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 공동체를 가리키며, ‘밤낮으로’는 1절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부르짖음’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박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간청함을 뜻하는 것으로(시편 5,2-4; 86,1-3; 88,2-3; 탈출 2,23-25),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믿음의 표현이다. 과부의 끊임없는 간청이 재판관으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어 올바른 판결을 하도록 만들었다면,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청을 들어주실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이어서 하느님의 도움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지니도록 격려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판결은 지체 없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 그분이 가장 좋은 때라고 결정하시는 시기이다. 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인내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당신을 부르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는 말씀으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람들이 믿음에 충실할지를 문제 삼으신다. 믿음을 보존하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이며, 이 기도로써 믿음이 성장하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굳센 믿음을 희망하는 기도에 대한 초대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새김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너무나도 큰 십자가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기도하기를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간청하는 과부의 모습을 통해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항구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신다. 기도 - 주님, 저로 하여금 항구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 박미숙 레지나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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