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8,18-27
하느님 나라를 찾는 부자 로마에서 마지막 1년을 앞두고 아토피로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아토피가 몸뿐 아니라 얼굴의 3분의 2 정도까지 퍼져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병원에 다녀도 전혀 차도가 없어 정신요법, 심리치료 등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치료도, 끝이 보이던 학위 논문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며 주님께 의지하였다. “주님,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음 깊이 예수님을 의지하였을 때, 그분은 나에게 놀라운 일을 하셨다. 내가 있던 기숙사에 침을 놓으시는 한국 형제님이 며칠 머물게 되었고, 그분에게 침을 맞으면서 눈에 띌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거의 70%가 나았다. 덕분에 학위 논문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느님은 당신 말고 다른 것에 집착하는 나에게 모든 것을 놓게 하셨고, 당신께 의지했을 때 당신을 드러내 주셨다. 루카 복음 18,18-27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에게 예수님은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모자란 것 하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우리가 집착하는 재물, 명예, 권력, 건강, 일 등이다. 재물에 애착하는 부자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하느님 이외에 애착하는 것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신다. 세상의 재물과 영원한 생명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을 때, 어떤 이가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복음사가는 그 사람에 대해‘어떤 권력가’ 라고 언급할 뿐 구체적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젊고 부유하며(마태 19,20-22) 율법에 충실한(21절) 회당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Διδασκαλε)”이라 부르며(여기서는 ‘선생님’이란 단어가 더 적합함.)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8절) 하고 물었다. 이는 율법교사가 한 것과 같은 질문으로(루카 10,25) 유다이즘의 전형적인 질문이다. 그의 질문은 그가 오랫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했으나 그분의 말씀을 가슴으로 깨닫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 나라와 진실로 당신을 따름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루카 14,25-18,17).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시고,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이시며 당신의 선은 바로 하느님에게 속해있음을 말씀하신다(19절). 계속하여 예수님은 십계명 가운데 제7, 6, 8, 9, 5계명을 언급하신다(탈출 20,12-16).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절). 이 계명들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대인관계를 위한 규범들로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웃과 관련되는 규정만을 제시할 뿐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루카 10,27)한다는 이중계명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1절) 하고 대답하는 그를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고 마르코 복음은 전한다(10,21).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구원의 길로 제시하였으며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고 믿었다. 그는 신앙심 깊은 부모 슬하에서부터 어른이 된 뒤에도 율법에 제시된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따르는 의인이었다. 그러나 율법 한 조목 한 조목을 성실히 지키면서도 그는 늘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켜온 율법보다 더욱 완전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한편 영원한 생명에 대한 어떤 확증도 예수님에게서 받고 싶었다. 예수님께서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2절)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한 일반적 권고가 아닌 ‘너에게(συι)’란 표현으로써 율법을 잘 알 뿐 아니라 성실히 지켜온 바로 그에게 말씀하신다. ‘모자란 것 하나’란 그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부분, 곧 그가 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으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재물에 대한 애착을 끊고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진 것’이라 함은 물질적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 이외의 것에 대한 애착을 뜻한다. 루카는 여기에 ‘다(παντα)’라는 형용사를 삽입해 예수님을 따름에 어느 일부가 아닌 가진 것 ‘모두’를 포기해야 함을 강조한다(5,28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라.’ 하심은 단순한 희사라기보다 나눔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며,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는 그를 선택하시어 당신 제자의 대열에 들게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이다. 불가능과 은총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심장이 꿰뚫리는 듯한 고통을 가져왔다. 그는 얼굴을 들 수도, 대답할 용기도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피하는 그의 마음에 많은 생각이 교차되었다. 영원한 생명, 재물의 나눔, 하늘의 보화, 예수님을 따름 등등.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가족을 떠나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도 그에겐 한없이 부담스러웠다. 제자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모두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사는 이들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이들이 아닌가? 예수님은 자신에게 그들처럼 살라고 하신다.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복음사가는 그가 매우 슬퍼하였다고, 그 이유는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말한다(23절). 슬퍼하는 그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4절)고 말씀하신다.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데 견주어 루카 복음에서는 모든 이에게 향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인용해 설명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25절)는 것이다. 이는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재물이 많을수록 그에 대한 애착도 많아지게 되므로 그것이 장애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는 당연히 구원받을 사람이라 여기고 있던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며 의아해한다. ‘누가’라는 말 속에 구원에 대한 희망의 빛이 사그라짐을 느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27절)는 말씀으로 군중들에게 다시금 빛을 희망하게 하신다. 곧 사람이 재물이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할 때 구원받는다는 말씀이시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이집트의 안토니오 성인이 그러하셨듯이…. 새김 -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나에게 ‘모자란 것 하나’는 무엇인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봉헌하였다고 여겼는데 아직도 많은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해야 할 일들, 처리해야 할 사건들, … 다시금 이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으며 그분께 의탁한다.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기도 - 주님, 당신 이외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어 모든 것 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 박미숙 레지나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10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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