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9,1-10
세리 자캐오, 예수님을 만나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컸으나 키가 작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을 뵙고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은 루카 18,24-27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셨지만 불가능한 이 일이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으로 실현된다(루카 19,1-10).
부자이며 세리인 자캐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다가오심에 적극적인 응답으로 구원을 이루어낸다. 우리는 자주 일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뵙고자 애쓰는 자캐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우리 마음에 지펴지기를 희망해 본다.
예수님을 향한 자캐오의 갈망
예수님께서는 눈먼 거지를 치유해 주신 다음, 예리코로 들어가셨다. 그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27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유다와 베레아 지방의 교역을 관리하는 세관이 있었다. 자캐오는 그곳의 책임자였다.
당시 세리들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다. 그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율법을 거슬러 대항하기도 하였기에 유다인들은 그들을 이방인처럼 여기고 경멸하였으며 거의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깨끗한’, ‘순수한’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말 ‘자카이’를 그리스말로 발음한 이름 ‘자캐오’는 부자였다. 이는 그가 올바른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자캐오는 동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그들의 지도자나 율법학자와는 다른, 무엇보다 죄인들로 다루어지는 자신들을 받아들여 친구가 되어주시어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곤 하며(5,30; 7,34; 15,2), 당신의 제자로 세리를 선택하기도 하셨다는 것이다(5,27).
자캐오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기를 바라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예리코에 오셨다. 이미 많은 군중이 그분을 에워싸고 있어 자캐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복음서 저자는 자캐오의 키가 작다고 설명한다. 키가 작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보려고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애쓰는 그에게 사람들은 길을 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분노한 모습으로 길을 막았다. 자캐오의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자신을 경멸하는 시선에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번번이 그는 상처를 받는다.
그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돌무화과나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앞질러 달려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비록 품위 없는 행동이지만 이런 적극적인 그의 모습은 마음 깊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드러낸다.
만남과 초대
나무 위로 오른 자캐오는 군중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또한 그 곁으로 지나가실 예수님을 가장 첫 줄에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고 계셨고 군중의 환호소리가 더욱 더 커져갔다. 그분은 돌무화과나무 아래를 스쳐 지나가고 계셨다.
그분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자캐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수님의 눈과 자캐오의 눈이 마주쳤다. 자캐오는 심장이 멎는 듯하였다. 형언할 수 없이 심오한 그분의 눈빛에서 자캐오는 동료들이 전해주던 모든 말들이 진실임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서도 그런 따뜻하고 진실된 눈길을 받지 못했던 자캐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캐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머물기를 청하지만, 사실은 자캐오를 당신의 나라에 초대하시는 것이다.
‘오늘’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룰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 ‘때’는 ‘지금’이다. “머물러야 하겠다.”는 말은 억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서 기인되는 필요성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심은 친교의 상징이며 용서를 뜻한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6절). 예수님의 초대에 자캐오는 적극 응답한다. 자신을 숨겼던 나무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과 군중 앞에 자신의 실재를 드러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자캐오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 기쁨은 그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으로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에게 “기뻐하여라.” 하였던 그 기쁨이 아니며,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돌아선 ‘부’가 주는 기쁨이 아니었다.
군중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7절)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자캐오는 들었다. 죄인의 집은 금지된 장소로(신명 21,20-21) 부정을 탄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세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백과 구원
자캐오는 일어서서 “보십시오, 주님!” 하며 예수님을 부른다. ‘보다’라는 동사는 이 텍스트에서 여러 번(3. 4. 5. 7. 8절)에 걸쳐 사용되는데, 3절에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뵙고자 원하였고, 8절에서 그분이 주님(κυριο?)이심을 알아보았다. 인간적이고 육적인 관점이 믿는 이들의 관점인 영적 시각으로 바뀐 것이다.
계속하여 자캐오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라고 선언한다. 일반적으로 랍비들은 재산의 20%를 자선하도록, 횡령을 한 경우에는 그것의 5분의 1을 갚으라고 가르친 것에 견주어 자캐오는 훨씬 많은 것을 내어놓았다.
자캐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었고 용기를 내어 그것을 고백할 수 있었으며, 이제 이웃과의 나눔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자캐오의 서약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의 표시이고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자캐오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회복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바로 그때 구원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캐오에게 선택된 백성의 축복을 전해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하여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자캐오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다(갈라 3,7 참조).
예수님은 10절에서 당신의 소명, 곧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음’을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착한 목자이며 ‘잃은 이들’이란 ‘잃은 양’(15,4)을 뜻하는 것으로, 자캐오는 목자를 찾아 헤매는 잃은 양이다.
‘찾다’라는 동사는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3절에서는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그분을 찾아 나선 것에 비해 10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당신의 잃은 이들을 찾으러 오셨다. 자캐오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잃은 양이었던 자캐오를 찾아 구원하셨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의 잃은 양들을 구원하시려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다가가신다. 그 누구도 제외함 없이….
새김 - 자캐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그분은 자캐오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캐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며, 손을 내밀어 당신에게로 이끄신다. 우리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당신 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기도 - 주님, 저희로 하여금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당신에게 적극적인 응답을 하게 하소서.
* 박미숙 레지나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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