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와서 보아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훌륭한 스승과 소중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래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위안을 얻으며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학교에서조차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폭력과 왕따, 성적 제일주의와 무한경쟁, 이러한 상황에서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목마를 때의 샘물이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품과 같은 평안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
요한 복음서는 머리글 다음에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 관하여 전해준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는 요한에게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그 예언자요?”
요한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요한이 세례를 주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세례자 요한도 바리사이들처럼 전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다만 계시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보다 앞서신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무엇을 찾느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을 자기 두 제자에게 알려준다. 두 제자는 자기 스승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하고 물으신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다.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근본적인 물음이다.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묻는 순간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순간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공적으로 명확하게 인류를 향해 던지시는 첫 번째 물음이다. 두 제자는 마치 인생을 함께할 결정적인 사람을 알게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으며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와서 보아라”
“무엇을 찾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 제자들은 무언가 새로운 기다림으로 곧바로 예수님께 묻는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때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이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는다. 그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복음서는 이 내용 이외에 다른 어느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와서 보아라.”라는 초대보다 더 이성과 자유를 완전히 존중하며 사람을 초대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이성과 자유!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성과 자유로부터 출발할 수 있도록 초대하신다.
두 제자는 하루 종일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이야기하고 바라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렸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 앞에서 억제할 수 없는 놀라움과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확실함과 특별함을 느끼며 “어느 누구도 그분처럼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을 것이고, 그 말씀과 존재감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안드레아는 기뻐 뛰며 형 시몬에게 가서 소리쳤을 것이다. “형, 형, 내 말 들어봐!” 강가에 있던 시몬은 “뭐야, 뭔데 그렇게 소리쳐?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하고 응수했을 것이다. “형, 내 말 들어봐.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어!”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단순하고 확실한 마음의 열정만 있을 뿐이다. 안드레아는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빛나는 얼굴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마치 모세가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살갗이 빛났던 것처럼!(탈출 34,29 참조)
이것은 영원한 동행이 될 사건이요 만남이었다. 안드레아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며 이르신다.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시지만, ‘케파’(곧 바위, 반석)로 불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베드로에게 미래 지도자로서 잠재적 가능성을 주시려는 것일까? 또는 그가 얼마나 쉽게 변할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기도 했지만(요한 18,17.25.27), 그에게는 양을 돌보라는 임무가 주어지고 착한 목자처럼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게 될 것이다(10,14-16; 21,15-19).
필립보는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유일한 제자이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성경에 기록된 분을 만났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것과 똑같은 말로 그를 초대한다.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그는 토라를 연구하려고 전통적 장소인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나아옴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고백하기에 이른다(1,45-49).
제자도(弟子道)
처음에 제자들의 믿음은 표징에 근거를 둔 믿음이다(2,11).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표징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신다(2,23-24).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표징 신앙으로 시작하지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1,37-38.40),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2,22).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발전되지 않는 믿음은 참된 제자로 이끌지 못한다.
요한 복음서를 계속하여 읽어보면 제자들은 라삐의 학생들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라삐라 부르고(1,38.49),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3,22),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사러 가기도 한다(4,8.31).
6장 이후 제자들에게 걸림돌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제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예수님의 말씀들은 제자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8,31)는 말씀이 바로 진정한 제자도의 척도이다.
내 말 안에 머물러라
“와서 보아라.” 하신 예수님의 초대는 제자들을 친구로 만들려는 방법이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첫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려고 해야 한다. ‘보러가지 않고’ 어떻게 그분을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이 초대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알려주는 성경에로 달려가 머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미사라는 천상 잔치에 초대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을 보려고,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보려고 필자는 오늘도 “주님, 어디에 사십니까? 어디 계세요?”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 여기 있다.” 하시지 않고 “와서 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 이름을 주시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만드시려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지인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친구가 맞을 것 같아요. 하나씩 알아가는 친구, 알아갈수록 매력적인 친구, 그런데 그 친구가 이미 저에게 씨는 뿌린 것 같아요.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친구의 말과 행동을 읽어가며 예전에 못 느끼고 지나갔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고, 그 씨가 싹이 돋아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해주네요.”
정말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처럼, 성경 말씀에 오래 머무르고 자세히 보아야 말씀이 좋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역시 그리스도인답군요.” 또는 “역시 수녀님답군요.”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인생길에서 결혼, 사제와 수도 성소, 직업 선택 등의 중요한 순간에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는 질문에 부딪친다. 그럴 때마다 성경 말씀과 미사라는 천상 잔치에 “와서 보아라.” 하고 초대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달려가자.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았지만 우리에게도 말씀과 성체를 통해 더 친밀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기도
주님! 복된 요한 복음서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깊은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 오늘 제가 당신과 함께 머물고 당신과 함께 세상을 보며, 당신과 함께 바쳐지는 티 없는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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