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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5: 카파르나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21 조회수5,901 추천수2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5) 카파르나움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출신인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그 후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고을”(마태 9,1)로 불린다.


위치와 지형

마태 4,13에서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곳으로 소개되는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다마스쿠스에서 티로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에 이르는 길에 위치한다. 갈릴래아와 다마스쿠스를 연결하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큰길이 지나갔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이후 카파르나움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지역에 속하였는데,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지역과의 경계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상업, 어업, 무역이 성행하고 번창하였던 그 곳에는 로마 군대의 주둔지(마태 8,5 이하), 세관(마태 9,9 이하)과 회당(마르 1,21)이 있었다.


구약성경의 카파르나움

구약성경에는 카파르나움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을 의미하는 케파르(Kefar) 나훔(Nahum)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이 나훔이 구약성경의 유명한 예언자 나훔과 동일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나훔이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더 많다.


신약성경의 카파르나움

카파르나움은 기원후 1세기의 신약성경 복음서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언급된다. 그곳에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있었다.(마르 1,29) 마태 4,14~16은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하신 것을 이사야의 예언(이사 8,23~9,1)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마르 1,21~34 병행은 카파르나움에서의 예수님의 하루를 소개하는데, 이것은 그분의 전형적인 일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분 전체 활동의 축소판인 셈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일은 가르침, 구마, 치유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세관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마르 2,14 병행), 그곳에 있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신다.(마태 8,5~13 병행) 요한 6,22~59에서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 11,23)라는 말씀을 듣는다.


요세푸스의 카파르나움

기원후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제1차 유다 봉기 당시 벳사이다에서 부상당하여 카파르나움에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자신의 자서전인 『생애』 72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유다 전쟁사』 3권 519~520에서 카파르나움에 대하여 서술한다. 이 기록은 당시의 전설을 전하는데, 어떤 갈릴래아 사람들은 카파르나움 샘의 물이 나일 강에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겐네사렛 호수 주위) 이 지역이 이처럼 비옥한 것은 온화한 기후조건 외에도 주민들이 카파르나움이라고 부르는 매우 확실한 수원을 통해 풍부한 물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샘이 나일 강의 지류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호수에 서식하는 까마귀 물고기와 유사한 어종이 이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중요 순례 장소

① 베드로의 집터

고고학자들은 여러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마르 1,29~31; 2,1 등에서 언급되는 베드로의 집터를 발견하였다. 특히 1920년대와 1968년~1991년의 탐사는 5세기에 세워진 팔각형 성당의 유적지 아래에서 집터를 발견하였다. 이곳은 갈릴래아 지방에 흔히 있는 현무암으로 지어진 가정집의 형태를 가졌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래아에서는 현무암으로 집을 짓고 지붕은 종려나무 가지 등으로 덮었다.(참조 마르 2,1~12) 베드로 집터의 바닥은 회반죽으로 되어 있었고 벽은 2세기 이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쓰여진 베드로 팻말과 어선의 그림도 발견되었다. 3세기~5세기 순례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의 글씨에서 예수님은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표현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일찍이 이 집터를 베드로의 집으로 여겼는데, 여기에서 가정용품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기원후 1세기에는 일종의 집-교회(House-Church)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1894년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② 팔각형 성당

1990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베드로의 집터 위에 어선 모양의 팔각형 성당을 건축하였다. 현재의 성당은 5세기에 세워졌던 팔각형 성당의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곳에 지어진 현재의 팔각형 성당 중앙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아래의 베드로 집터와 본래의 팔각형 성당 터를 볼 수 있다.

③ 유다인 회당

베드로의 집터에서 약 10m 떨어진 곳에서 흰색 석회암으로 지어진 회당이 발견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 회당을 기원후 2세기나 심지어 예수님 당시의 회당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8년의 고고학 탐사 결과, 회당의 연대는 4세기 혹은 5세기로 추정된다. 회당의 입구는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을 향하여 있고, 남북으로 24m, 동서로는 18m 정도의 크기이다. 그런데 이 회당은 현무암으로 지어진 더 이른 시기의 다른 회당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 현무암 회당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었을 것이다. 사실 루카 7,5에 따르면, 카파르나움의 회당은 백인대장에 의해 세워졌는데 유다인의 원로들은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주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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