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도덕 해설] 노다지 발견!
오늘 2012년 6월 26일, 아침 출근길 아현동에서 혜화동으로 가던 160번 버스 안에서 노다지 발견! 그 노다지는 바로 「성경과 도덕」 81항입니다. 하루 종일 머물러있어도 부족할 단락입니다.
지난 여러 달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모두를 훑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먼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한결같이 그 부르심에 충실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선물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는 그 장면에서부터 아담은 하느님을 거스르기 시작하고,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살아온 역사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아담이나 이스라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오늘 제가 발견한 ‘노다지’입니다.
하느님을 거스른 아담은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부를수록 멀어져 가는(호세 11,2 참조)그 이스라엘을 끝없이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용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는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사랑을 받는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시고 인간이 세상에 미친 손상을 복구하시는 자비로우신 창조주”(81항)이시기에 이 세상이 유지되어 가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제사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그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를 죽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보호를 상징하는 가죽옷을 입혀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카인은 형제를 죽인 사람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복수를 당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인 카인을 해치는 사람에게 일곱 곱절의 앙갚음을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인간의 죄는 무수히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은 손을 내밀어 당신에게서 멀어져 간 인간을 부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용서에 대해 말하는 대표적인 본문은 사제계 전승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사들, 특별히 속죄일의 예식에 관한 본문들을 들 수 있지요. 제사들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조금 보충 설명을 하자면, 레위기는 모세 시대에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유배를 겪으면서 완성되어 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집트 탈출 때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셨던 그 계약이 거의 파국을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올바로 살라고, 멸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할 때가 아닙니다. 벌써 죄를 지었고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게 강조된 주제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과 맺었던 계약을 충실히 유지하며 살 수 없었을 때, 레위기는 하느님 편에서 그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해성사가 그렇듯이, 죄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충실함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할 때에도 하느님의 충실하심은 인간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노다지’의 절정이 81항 끝부분입니다. 이 노다지에서 금을 캐시려면, 괄호 안에 표시되어 있는 성경 본문들을 찾아서 그 앞뒤 문맥까지 보셔야 합니다. 두 본문만 제가 대신 찾아드리겠습니다.
탈출 34,6-7에서는 주님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하느님,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 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탈출기 34장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로 한 계약을 깨뜨렸을 때 (모세는 계약의 돌판을 깨어버렸지요.) 하느님께서 다시 돌판을 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은 당신께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호세 11,9)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는, 배반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여 다시 데려오는 호세아 예언자의 모습을 통하여 당신을 저버리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책이지요.
용서하시는 하느님.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다른 어떤 민족보다 악해서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많은 죄가 있어야 했는지, 어쩌면 끝까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죄는 그 죄로 인간이 하느님께 입혀드린 상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한 번 또 한 번, 하느님 편에서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많은 위기를 겪어냅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
마태오 복음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1,21).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1,22).
“예수”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합니다. 그 구원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 곧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계시려 하시는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온전히 실현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을 하느님과 갈라놓는 죄를 없애시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는 것”(82항)입니다.
복음서들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신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사람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은(마태 9,6참조) 하느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용서를 실현시키십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을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셨음을 선포하시고,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친교에 그들을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내어주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요한 3,17)이었습니다.
이러한 용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세리들만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로마 3,23)이 죄를 지었습니다. 바오로 자신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를 박해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회심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으나 주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도들은, 세리와 창녀에게 선포하신 예수님의 용서가 자신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하려고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화해를 중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사명을 주셨고, 그래서 교회는 세례와 화해의 성사, 그리고 병자 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상처 입으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 마지막 상처를 봅니다. 자꾸만 당신의 손을 뿌리치려는 우리의 손목을 꼭 붙드시느라 피를 흘리시는 그 손을 봅니다. 우리 손으로 하느님을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면 벌써 수없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갔을지 모릅니다. 아담, 카인, 노아 시대의 사람들, 바벨탑을 쌓은 이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시며 놓아버리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그 하느님의 충실하심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4).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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