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돌을 치워라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특히 돌봐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을 때, 죽음은 가혹하게 느껴진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우리는 무덤 속에 갇힌 듯 캄캄하고 두렵기만 하다.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베타니아에 사는 라자로가 앓고 있었는데, 그의 오누이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다.
예수님이 즉시 가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베타니아에 도착하시기 전에 라자로가 죽은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타니아에 가시는 도중 제자들에게 라자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셨고(11,11),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그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데에서 드러난다(11,14). 예수님은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타니아에 도착하셨을 때는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예수님은 “요르단 강 건너편”(10,40)에 계셨었다. 거기서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까지 나흘이 걸리지는 않는다. 심부름꾼들이 예수님께 오는 데 하루,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르셨고, 예수님이 베타니아로 오시는 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라자로의 죽음을 아시고도 지체하신 이유는 그 표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다(11,4.1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죽은 오빠 때문에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부활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부활은 생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생명은 부활의 내적 본질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체적 죽음을 겪겠지만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갖게 될 것이며,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1,25-26 참조). 더구나 그들은 현세에서 그 생명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생명이신 주님과 단절되어 있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약속은 라자로가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자로는 그 이후 언젠가 다시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자로가 육신적으로 다시 산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위한 예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11,33). “마음이 북받치다.”라고 해석된 희랍어는 원래 말이 경주에서 콧김을 내뿜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죽음과 그것이 야기하는 황폐에 대해 분노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도 분노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신 것과 마리아와 유다인들이 울었다는 희랍어 표현은 다르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사랑하는 라자로에 대한 비통함 때문만이 아니라, 죄와 죽음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의 비참한 상황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음 산란해하신다. 예수님이 산란해하신 것은 사랑하는 라자로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번민에서(12,27), 그리고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을 예언하실 때였다(13,21).
“돌을 치워라”(11,39)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신다. 그러나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며 즉시 따르지 못한다. 이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치운다. 동굴과 돌은 어두움과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다. 돌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도구이기도 하다(8,59; 10,31; 11,38).
유다교의 전통에서 인간의 영혼은 죽은 뒤 사흘이 될 때까지 육체 주위에 머물렀으며 그 후에 몸을 떠난다고 생각했기에, “나흘이 지났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육체가 손상되었다는 의미이다. 돌은 무덤을 막는 도구이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부활의 빛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막고 있는 교만과 악습과 죄악 같은 돌을 치워야 들어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11,43)
최고 절정은 예수님이 죽은 친구 라자로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아버지께서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셨음을 확신하시고 감사드리신다.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신다. 그러자 라자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나온다. 그의 아마포에 싸인 모습은 ‘다시 살아나지만 다시 죽게 될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예수님은 아마포를 무덤에 두고 나오셨다. 요한
20,7 참조).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신적인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이 죽음을 없애주시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이사 25,8).
“믿으면 하느님 영광을 보리라”
그런데 이야기의 핵심은 라자로가 아니다. 이 사건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일곱 번째 표징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시사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알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고 공감하시지만,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라자로의 병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배했을 것이다. 우리는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생명을 맛보다!
영생이란 죽은 뒤에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믿어 얻게 된 생명이 계속되는 것이다. 성체를 영하고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생명을 보존하고 이웃과의 사랑을 통해 그 생명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말도 못하고 오랫동안 누워계시는 환자들에게 “당신은 지금 생명을 누리고 계신 것”이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참고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에게 힘을 주시기에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기도를 해드리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면 금방 생기가 돌고 안색이 좋아지신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질그릇 속에 보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1).
최근에 읽은 노 사제의 회고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음은 이별이지만, 죽는 자에게 죽음은 ‘오랫동안 늦춰진 친구와의 만남 같은 것’이다”(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인간은 살아오던 모습으로 죽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의 친구로 살았다면 자연히 죽음을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
주님, 저희가 이 세상 삶이 끝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저희가 일상생활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친구이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배울 수 있게 하루하루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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