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자리] 역사서 해설과 묵상 9 : 여호수아기의 역사적 신빙성 (1)
여호수아기는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 어느 정도로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가? 고고학적 발굴결과들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답부터 말한다면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거기에 정착했던 과정을 단계별로 자세히 보고하는 책이 아니다. 물론 현대의 많은 학자가 여호수아기가 근거한 자료들의 가치를 점점 더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카우프만(Y. Kaufmann) 같은 극단적인 보수학자는 여호수아기의 일치성과 고대성을 동시에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여호수아기는 가나안 정복과 정착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하며 이런 사건들 직후에 기록되었다. 여호수아기 13-21장의 도시 목록들도 기원전 1200년경의 초기 정복시대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기가 전하는 기원전 1200년경의 사건과 기원전 6세기 이 책의 최종적인 편집 사이에는 수세기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 또한 역사비평적으로 볼 때, 여호수아기가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부족 전체에 의한 완벽한 가나안 정복이라는 이론은 더 이상 내세울 수 없다. 사실 가나안 지역은 기원전 10세기 다윗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되었다. 여호수아기 자체도 그런 암시를 여러 곳에서 한다. 가나안 족속들이 완전히 섬멸되기는커녕 오히려 평야지대에 그대로 살고 있고, 그래서 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공존이 있었다고 말한다(여호 15,63; 16,10; 17,12.18 참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부족들에게 이미 땅을 분배했지만(13-22장) 그의 노년에는 아직도 많은 땅이 정복해야 할 땅이었다(여호 13,1-7 참조). 이처럼 여호수아기의 역사적 신빙성이 희박한 이유는 신명기 학파에 속하는 편집자에 의해 쓰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기의 역사적 신빙성을 검증하는 데 고고학적 증거들이 인용될 수 있다.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의 도시들을 발굴해 본 결과,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400-1200년경)와 철기 시대(기원전 1200-900년경) 사이에 심하게 파괴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베텔, 드비르, 라키스는 기원전 13세기에 심하게 파괴된 흔적이 있고, 그 폐허 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징적인 거주지역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을 기원전 1230년-1200년경으로 본다면 이런 파괴의 흔적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실제로 존 브라이트(J. Bright)는 이런 고고학적 증거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그런 파괴의 흔적들을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의 증거로 삼을 수 없게 하는 반증도 만만치 않다. 다시 말해 그런 파괴를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 생긴 분쟁의 결과로 볼 수도 있고, 그 시대에 서로 다른 민족들이 가나안 땅으로 침입해 들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대 성읍들의 파괴가 이스라엘 어느 한 지파에 의한 것인지 또는 일사분란한 정복전쟁의 결과인지를 결론짓는 것은 고고학의 한계 밖의 일이다.
묵상 주제
“너는 늙고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차지해야 할 땅은 아주 많이 남아 있다”(여호 13,1). [2012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 : 여호수아기의 역사적 신빙성 (2)
여호수아기와 판관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가? 여호수아기의 묘사보다는 판관기의 묘사를 믿을만한 것으로 간주해온 것이 학계의 오래된 통념이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예를 들면 G. E. Wright)은 판관기보다는 여호수아기의 전투 이야기를 더 신뢰한다. 그것은 판관기 1장의 부분적이고 모순적인 자료와 비교해 볼 때, 여호수아기는 가나안 점령을 전체적인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정복사건이 여호수아기에 기록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올브라이트(W. F. Albright)는 여호수아기 2-12장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서로 다른 지파들의 연속적인 이주와 연관시킨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고고학적 발굴결과는 여호수아기의 정복 이야기가 기본적인 역사성이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Ai)’의 발굴결과는 또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도시는 여호수아 시대보다 1,000년 정도 앞서는 시대에 파괴된 흔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브라이트는 아이 이야기와 베텔 이야기 사이에 혼동이 있었다고 본다(여호 8,9.12.17 참조). 사실 여호수아기 8장은 아이를 공격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아이와 베텔”, “아이와 베텔 사이”라고 한다.
고고학적 발굴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여호수아기 10장에 나오는 남쪽 도시들의 정복을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리브나, 라키스, 에글론, 마케다는 평야지대에 인접해 있는 도시였고, 기원전 12세기 초 유다지파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판관기 1장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해서 본다면, 우리는 여호수아기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가나안 정착이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리코와 아이의 파괴에는 고고학과 여호수아기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여호수아 시대에 예리코와 아이에서는 파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기의 정복 이야기는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기의 편집자는 신학적인 동기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개했던 것 같다. 그 신학적인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편집자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진정한 후계자로 부각시키려 했다. 유일한 군사적, 종교적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2) 편집자는 이스라엘을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백성으로 부각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일치성은 여호수아 시대에는 매우 약했고 솔로몬 통일왕국 시대에 가서야 나타났다.
3) 백성의 유일성은 곧 땅의 유일성과 연관된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의 약속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한다. 여기서 편집자는 다윗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룩된 통일왕국이라는 상황을 과거 여호수아 시대로 소급하여 적용한다.
묵상 주제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주겠다”(여호 1,9). [2012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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