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왕국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진다. 남쪽은 다윗 가문이 왕조를 이어갔지만 북쪽은 10지파가 ‘예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했다. 남 왕국은 ‘유다국’이라 칭했고 북왕국은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국호로 보면 정통성은 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북 왕조가 정치 경제면에서 우세한 국면을 계속 유지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다.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치기 위해 기원전 722년 북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놀란 남왕조는 이집트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이집트 역시 아시리아를 막기 위해 남쪽의 유다국을 지원했다.
포로가 된 북쪽 주민들은 대부분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갔다. 당시 한 나라를 멸망시키면 주민들은 ‘하층계급’으로 전락했고 살던 곳을 떠나야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뿌리(고향)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정복자들의 ‘이주정책’이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이 사건으로 급속하게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남쪽의 유다 왕국도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그동안 이집트와 동맹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실은 속국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이후 임금들은 ‘탈 이집트’ 정책을 고수했고 정점은 16번째 임금 ‘요시아’였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 역시 이집트에 저항하다 ‘파라오’에게 살해된다.(2열왕 23,34) 이집트는 요시아의 둘째 아들 ‘여호야킴’을 왕으로 내세우며 뒤에서 조종을 계속했다.
이렇게 해서 유다국은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 와중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왔던 것이다. 여호야킴은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지만 이집트의 부추김으로 반기를 들다 살해되고 만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왕이 되지만 석 달 만에 항복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의 포로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약속의 땅’가나안을 떠나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에 거주하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각 지파의 독자성을 버리고 유다 지파 중심으로 뭉쳤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유다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한다. 황제 ‘키루스’는 포로로 붙잡혀 왔던 여러 민족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종교와 언어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된다. 포로생활은 유다인들의 해외생활의 시작이었다. 키루스 황제가 귀환을 허락했지만 바빌론에 남아있는 유다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2009년 4월 26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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