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아사 임금
아사는 남쪽 ‘유다 왕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솔로몬의 증손자다. 할아버지 솔로몬 시대의 부패를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결정적 원인은 우상숭배였다. 솔로몬의 융화정책이 종교적 순수성을 훼손하고 ‘외국의 신’들을 불러드렸기에 나
타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런데도 후계자들은 우상숭배를 근절하지 않았다. 아사 때 처음으로 정화작업이 일어났다.
아사는 아비얌의 아들로 41년간 왕으로 있었다. 그동안 ‘북쪽 임금’은 6명이 교체되었다. 나답과 바아사, 엘라와 지므리, 오므리와 아합이다. 세 사람은 쿠데타로 왕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다. 여섯 임금 모두 우상숭배를 근절하지 않았고 학정으로 백성을 괴롭힌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사는 착한 군주였다. 당시 ‘왕실의 상황’으로 볼 때 그는 좋은 영향을 받기 어려웠다. 할아버지 르하브암의 생애는 엉망이었고 아버지 아비얌은 3년밖에 통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신심 깊은 왕으로 출발한다. 주님께서 다윗과의 약속을 기억하시어 그를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1열왕 15,4). 아무튼 아사는 41년을 통치하며 장수를 누렸다.
아사는 개혁의 방향을 율법에서 찾았다. 율법을 최우위에 두었고 위배되는 상황은 과감히 청산해나갔다. 그의 정책은 아들 ‘여호사팟’에게 이어졌고 그 역시 의로운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사는 모든 도시에서 이교도의 산당과 분향 제단을 없앴다(2역대 14,4). 반발도 있었다. 솔로몬의 며느리였으며 아사의 할머니였던 ‘마야카’의 저항이었다. 그녀는 갈릴래아 북쪽에 있던 ‘그수르’ 왕국의 공주로 시집올 때 ‘아세라 우상’을 가져왔고 이를 왕궁 안에 세우고 섬겼다. 아사가 이 상을 부수려 들자 반발한 것이다.
아사는 그녀를 모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우상은 ‘키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라 버렸다(1열왕 15,13). 이후부터는 아무도 아사의 정책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아세라’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여신이었다. 남신은 ‘바알’이었고 두 신의 조화로 만물이 생성된다고 믿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우상에 빠지는 것을 수차례 경고했었다.
아사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초기에는 우상 타파와 사회 개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며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북쪽 임금 ‘바아사’가 수차례 전쟁을 걸어오자 어쩔 수 없이 ‘다마스쿠스’의 임금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예언자 ‘하나니’는 아사를 힐책한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아사는 고집을 부리다 발에 생긴 병으로 죽는다.
[2009년 5월 3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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