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오므리
오므리는 ‘아합’ 왕의 아버지로 이스라엘 6대 임금이다. 군인이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다. 북 이스라엘이 출범하고 세 번째 맞는 쿠데타였다. 왜 이렇게 왕위 쟁탈전이 자주 일어났을까? 원인은 정통성의 부재였다. 남북으로 갈라질 때 왕족이었던 다윗 가문은 모두 남쪽에 남았고 예루살렘 제사장 가문은 아무도 북쪽으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북쪽의 첫 임금 ‘예로보암’은 힘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다잡았고 불만은 누적되었다. 마침내 그가 죽고 아들 ‘나답’이 왕이 되자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켜 왕을 살해했다. 첫 번째 쿠데타였다. 이후 군인들은 틈만 나면 왕위를 넘봤고 정변은 끊이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은 200년간 존속하며 19명의 왕을 배출했는데, 8명의 왕이 살해되었고 왕조는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이러한 혼란은 이스라엘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오므리’가 등장했을 때는 외세의 침입을 자력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해져 있었다. 그는 즉시 정적들과 타협하며 국력을 키웠는데 먼저 맏아들 ‘아합’을 도시국가 ‘시돈’의 공주인 ‘이제벨’과 혼인시켰다.(1열왕 16,31) 시돈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접 국가들을 견제하며 교역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폐해는 심각했다. 이제벨의 일행이 왕궁에서 자신들의 우상을 섬겨도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제벨은 아합의 왕비가 되자 ‘바알신앙’을 노골적으로 강요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에 대한 배반이었고 치욕스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강력한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등장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개입이셨다.
오므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이스라엘의 분산되었던 힘을 규합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했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오늘날 오므리의 이름은 성경 밖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아시리아’의 비석에는 그가 ‘모압’을 정복하고 ‘티레’(티로)와 동맹을 맺었으며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아들 아합 때는 정치 경제면에서 이스라엘이 번영을 되찾게 된다. 특히 아합은 ‘티로와 시돈’의 상권을 받아들이며 ‘페니키아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주력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그들을 동조하는 상인들이 등장했고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 한편 페니키아 토족의 딸이었던 이제벨 왕비는 이들을 후원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제관’들과 대결했을 때 그들의 숫자는 ‘850명’이었다. 이제벨은 이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1열왕 18,19)
[2009년 6월 14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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