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사마리아 (1)
오늘날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중부지역을 뜻한다. 열왕기 상권에는 사마리아에 대한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유다임금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아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열왕 16,24)
이렇듯 사마리아는 아합왕의 아버지 ‘오므리’가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 성을 쌓고 요새로 만든 뒤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평지보다 100m 정도 높은 지역이어서 방어에 유리했던 것이다. 실제로 훗날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사마리아는 3년을 버티며 저항하다 식량부족으로 항복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팔레스티나를 차례로 정복했지만 사마리아 지역만큼은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은 여전히 가나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통합은 다윗 임금 때 실현되었고 그때부터 사마리아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는 ‘스켐’이었는데 오므리가 세운 신도시와는 11km 떨어져 있었다.
스켐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세 12,7). 이후 스켐은 이스라엘의 성지가 되었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과 북이스라엘의 첫 임금 ‘예로보암’은 모두 스켐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으로 공인받는 장소를 예루살렘이 아닌 사마리아의 스켐을 선택한 것이다. 그만큼 상징성이 강한 도시였다.
현재 스켐 일대는 개발되어 거대한 도시가 들어섰다. 아랍지역 4대 도시 중의 하나인 ‘나불루스’다. 기원후 72년, 로마 군인들은 이 지역을 ‘군사 요충지’로 만들며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네아 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신도시’라는 뜻이다. 636년 아랍인들은 이곳을 점령하고 ‘네아 폴리스’를 아랍 발음으로 ‘나불루스’라 했다. 하지만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차지했고 현재는 이스라엘 점령지다.
한편 오므리가 세웠던 사마리아 산상(山上) 도시는 산골동네로 바뀌었고 인근 ‘나불루스’의 관광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지명은 ‘세바스테’다. 기원전 30년, 헤롯대왕은 사마리아를 정비하고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도시이름을 ‘세바스테’로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를 그리스어로 ‘세바스토스’라 불렀기 때문이다. 헤롯은 사마리아에 로마문화를 이식하려 애썼지만 로마 군인들이 ‘스켐’에 신도시를 건설하자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2009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사마리아 (2)
이스라엘의 6번째 왕이었던 ‘오므리’는 바위산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사마리아’라 불렀다. 그런 뒤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왕궁을 지었다. 이후 이 지역은 도시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리게 된다.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의 외곽지대를 경기(京畿)지방이라 부른데서 오늘날의 경기도가 유래된 것과 비슷하다.
사마리아 북쪽은 ‘갈릴래아 지방’이며 서쪽은 지중해에 닿아 있다. 동쪽 경계는 ‘요르단 강’이며, 남쪽은 큰 경계 없이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지방’까지 이어져 있다. 사마리아는 완벽하게 이스라엘의 중부지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무너진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3만여 명의 주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바빌론과 ‘쿠타’(Cuthah)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쿠타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던 고대 도시였다. 이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자신들과 구별해서 ‘쿳팀’이라 불렀다. ‘쿠타 출신’이라는 뜻이다.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정통 이스라엘로 간주했으며 토속 성경인 ‘사마리아 5경’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사마리아’에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켰다. 그러자 도시는 희랍문화를 받아들이며 화려해졌다. 로마시대에는 헤롯대왕이 사마리아를 확장시키며 로마 문화를 이식했다. 궁전에 있던 자리에는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유다인들은 더욱 사마리아를 차별대우했고 북쪽으로 갈 때도 사마리아 도시는 지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이 많지 않으셨지만 성경에는 언급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그리고 나병환자 10명을 치유했을 때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드렸는데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 그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았다. 그녀 역시 사마리아 출신이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긴가민가하고 있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알아본 것이다.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레위인과 사제는 모른 채 하고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그토록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율법에 ‘목을 매는’ 유다인들보다 낫다는 암시였다.
사도시대에는 희랍어에 능통한 교우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이 사건은 훗날 초대교회가 이방인 세계로 뻗어가는 전환점이 된다. 사마리아에는 세례자 요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전해져 왔으며 그를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2009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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