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스켐(나블루스)
아브라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을 향해 떠난다. 그러다 스켐에서 처음으로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창세 12,6-7). 예루살렘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마을이었다. 한편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차지한 뒤 요셉의 유골을 이곳 스켐에 안치했었다(여호 24,32). 훗날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열두 지파를 스켐에 소집한다(여후 24,1). 그는 지파간의 단결을 당부한 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110살이었다. 이후 스켐은 열두 지파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고 요셉의 큰 아들 ‘므나쎄’의 후손들이 관리했다.
지금도 스켐은 유다인들이 신성시하는 도시다. 최근까지 요르단 소속이었지만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뒤 돌려주지 않고 있다. 스켐의 말뜻은 ‘목덜미’라고 한다. 도시를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이 감싸고 있기에 생긴 명칭일 것이다. 그만큼 난공불락의 도시라는 말이 되겠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BC 931년) 북쪽은 ‘예로보암’이 왕권을 장악했었다(1열왕 12,20). 그는 스켐을 수도로 삼고 남쪽과 대치했다.
그러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을 스켐에 대거 이주시켰다. 세월이 흐르자 스켐 주민과 그들은 피가 섞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남쪽의 유다인들은 스켐이 속한 ‘사마리아 지역’을 이방인의 땅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짐 산’에 성전을 짓고 그들만의 종교를 시작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까지도 이질적으로 되어갔던 것이다. 결국 마카베오 시대에 그리짐 산 성전은 파괴되고 만다.
한편 기원전 72년에는 로마황제 ‘티투스’가 스켐을 재건한다. 그는 산 중턱까지 집을 짓고 도시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라고 부르게 했다. 플라비아는 부친 이름(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에서 따왔고 네아폴리스는 ‘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런데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발음에 따라 ‘나블루스’로 불렀고 현재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스켐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길목이다. 이집트에서 요르단과 시리아를 가려면 예루살렘까지는 외길이고 스켐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부터 대상(隊商)들이 모여드는 교통의 요지였고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12월 25일 · 26일 예수 성탄 대축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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