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에세네파
유다 마카베오의 독립전쟁에 히브리인들은 적극 가담했다. 특히 계율에 충실했던 하시딤의 참여는 막강한 힘이 되었다(1마카 1.42). 하지만 이들은 전투는 능동적이었지만 정치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하고 그의 동생 요나탄이 실권을 잡자 이들에게 난감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희랍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희랍의 ‘발라스’ 임금이 요나탄을 회유하기 위해 대제사장직을 제의했던 것이다(1마카 10,20). 하지만 요나탄은 ‘차독 가문’이 아니기에 대사제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가 제사장직을 받아들이면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제안을 빌미로 스스로 대제사장직에 올랐다. 당연히 ‘하시드 사람들’은 반발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정통 대사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논리가 앞서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하시딤이 그를 지지하며 요나탄의 군대를 떠났다. ‘정통 대사제’는 추종자들과 함께 광야로 물러가 때를 기다렸다. 그가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에세네파는 이 와중에 태동했다. 요나탄을 반대하며 돌아섰던 강경세력이 에세네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쿰란 공동체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에세네파는 삼천 명이 넘었고 대부분 쿰란 공동체에 합류해 핵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모세가 활동하던 시기의 광야생활을 모델로 받아들였으며 임박한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재산은 공유했으며, 독신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래된 회원일수록 흰옷을 입었고 성경을 중시해 많은 필사본을 남겼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이들의 공동체도 와해되고 만다.
‘에세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다만 이 단어가 ‘경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시딤(hasidim)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표현이 등장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에세네라는 말은 쿰란문서나 신약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에세네파는 여러 면에서 신비스런 조직이었다.
[2011년 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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