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단식
구약에서 공적으로 단식하는 날은 속죄일 하루뿐이었다. 회개의 표시로 음식을 금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식의 성경적 의미는 ‘참회를 위한 고행’이라 할 수 있다. 죄를 뉘우치는 수단으로 단식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어디에도 단식이 목적이 된 예는 없다.
사무엘은 이방인과의 전투를 앞두고 미츠바에서 제사를 올린다. 그러자 백성들은 자진해서 단식하며 죄를 뉘우쳤다(1사무 7,6). 그 결과 주님의 개입으로 이방인들은 자멸하고 만다. 이렇듯 단식은 도우심을 청하는 긴급 수단이기도 했다. 바빌론 포로지에서 귀향하던 에즈라는 함께 고행하며 단식하자고 권한다.(에즈 8,21) 주님의 이끄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다(루카 18,12).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디다케’에 의하면 월요일과 목요일 자발적으로 했다(디다 8,1).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속죄가 명분이었다. 이들의 단식은 영향력이 있었고 경건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단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질문 받기도 했다(마르 2,18). 문맥으로 보아 일종의 불평이었다. 단식자체에 종교적 전통이 부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단이 목적으로 바뀐 그들의 행동을 꾸짖으신다. “너희는 단식할 때 위선자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너는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만 보이게 하라.”(마태 6,16-18) 단식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도 받으셨다. 잔치에도 기꺼이 참여하셨다. 성경에는 가끔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도 비유되신다. 그분께서는 먹고 마시는 자체를 죄악시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건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주님의 나라에서 배고픔은 어색하다. 그러한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유목민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지금도 철저하게 단식한다.(라마단 의식) 대개 9월 초가 되면 한 달간 해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금식이다. 구약 시대의 단식이 확장된 모습이다.
[2011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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