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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10: 벳사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1 조회수7,969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0) 벳사이다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주로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서 이루어졌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활동하신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고을들을 소개하는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등이다.(마태 11,21-24) 벳사이다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기원후 66-70년에 일어난 제 1차 유다 봉기에 적극 가담하여 결국 파괴되었다. 그 후 지진, 홍수 등을 거친 벳사이다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이 있기 전까지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위치와 지형

벳사이다라는 이름은 “고기잡이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어촌이었던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으로 약 2km, 곧 요르단강 상류가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 888번 도로의 벳사이다 교차로로부터 북쪽으로 750m 지점이다. 벳사이다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는 하부 골란 고원의 서쪽에 위치한다.


신약성경의 벳사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는 벳사이다 출신이다. 요한 1,44에 따르면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여기서 안드레아와 필립보라는 제자들의 이름은 둘다 셈족어 방식이 아닌 그리스식 이름이다. 이것은 당시 벳사이다가 헬레니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요한 12,20-21에는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라고 언급된다. 여기서도 벳사이다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벳사이다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마르 8,22-26에 따르면 예수님은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루카 9,10-17에서 예수님은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여러 고을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


요세푸스의 벳사이다

요세푸스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제13년, 즉 93-94년에 쓴 『유다 고대사』는 스무 권으로 된 방대한 작품으로서,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제1차 유다 봉기의 발발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유다 고대사』 18권 28에는 벳사이다가 언급된다. “필리포스는 겐네사렛 호수에 위치한 벳사이다를 고을에서 도시로 승격하였다. 그곳은 주민이 많고 웅장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이름을 따서 율리아스(Julias)로 불리었다.” 필리포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기원전 4년-기원후 34년에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부 지방인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였다. 그는 기존의 벳사이다를 도시로 확장하였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부정확한 점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기원후 14년)의 딸인 율리아, 즉 리비아(Livia)는 기원후 2년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사실 필리포스가 벳사이다를 율리아스라고 부른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14-37년)의 어머니,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녀는 기원후 29년에 죽었다. 필리포스는 30년경에 “율리아 아우구스타”(Julia Augusta)라는 명각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인 리비아의 상을 새긴 동전을 만들었다. 필리포스는 34년에 벳사이다, 곧 율리아스에서 죽었고 그곳에 매장되었다고 하나(『유다 고대사』 18권 4.6), 그 무덤의 위치를 알 길이 없다.

이와 같이 기원후 1세기 말에 기록된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는 벳사이다를 율리아스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로서 70년 경에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는 벳사이다로만 언급한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는 기원후 30년 이전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

벳사이다의 폐허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1987년에 네브라스카 대학교(University of Nebraska)의 고고학자 라미 아라브(Rami Arav)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벳사이다의 가옥 형태가 드러났다.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에 지어진 어떤 집은 13.5m×7m 규모의 돌이 깔린 안뜰을 가진 형태를 가진 것으로, 그곳에서 다양한 고기 잡는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도구들은 낚시 바늘, 그물추, 돛을 만들거나 수리하는데 사용된 굽은 청동 바늘 등이다. 그래서 이 가옥을 “어부의 집”이라 부른다. 그리고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의 집으로 추정되는 가옥 구조도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포도주 저장실, 포도주 담는 항아리들과 갈고리 등이 발견되었다.

아라브는 1996년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기원전 10-9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을 발견하였다. 벳사이다에서 발견된 네 개의 방을 가진 성문 구조(four chambered gate)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제법 규모가 큰 성문이었다. 아라브는 성문에서 산당(high place)과 세워진 두 개의 돌(standing stone)도 발견하였는데 그중 하나에는 황소 모양의 전사가 새겨져 있다. 벳사이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곳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은 향후 신약성경과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흥미로운 결과들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0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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