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1) 막달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 중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마태 27,56.61; 28,1; 마르 15,40.47; 16,1.9; 루카 24,10; 요한 19,25; 20,1.18) 혹은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가 있다. 이 이름은 막달라 마을 출신 마리아라는 뜻이다. 사실 이 여인과 관련 있는 막달라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발견되었다.
위치와 지형
갈릴래아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는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약 4km,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의 막달라에는 옛 도시의 폐허만 남아있다. 막달라 주변 지역은 겐네사렛(Gennesaret) 땅이라고 불리는 비옥한 곳이다. 이 지역의 명칭은 아마도 막달라 북쪽의 옛 도시 겐네사렛 때문이든지 갈릴래아 호수가 겐네사렛 호수(마르 6,53)로도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 3권 516-517에는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한다. 기후도 다양한 종류의 작물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다른 식물에 비해 특히 서늘한 기온을 필요로 하는 호두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된다. 높은 기온에서 잘 자라는 종려나무들 근처에는 온화한 기후를 좋아하는 무화과와 올리브나무가 자란다.”
막달라(Magdala)의 이름은 “탑, 망루”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미그달(Migdal)에서 유래했다. 아마도 이곳에 유명한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기원후 1세기 전반부에 막달라는 물고기를 잡아 준비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막달라는 아람어로 “고기잡이의 망루”를 뜻하는 미그달 누나야(Migdal Nunayah)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리스어로는 타리케아(Taricheae)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이다. 사실 그리스어 타리케이아이(taricheiai)는 “물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장”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아그리파 2세(53-100년?)에게 막달라를 주었을 때 도시의 이름을 타리케아로 바꾸었다. 요세푸스는 『유다 고대사』 20권 159에서 이 명칭을 사용한다. 사실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다인들의 제1차 봉기 시기에 갈릴래아 유다인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막달라를 요새화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아스에서 한 것처럼 튼튼하게 성벽을 세우는데 필요한 자원을 가지지는 못했다.(『유다 전쟁사』 3권 464-465) 막달라는 갈릴래아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기지가 되었는데(『생애』 156-164), 실제로 막달라에서 로마군대와 유다인 저항군 사이에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유다 전쟁사』 3권 462-542) 요세푸스는 기원후 67년경에 막달라의 인구가 40,000명이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과장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신약성경의 막달라
루카 8,1-3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다른 여인들 가운데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소개된다. :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르 15,40-41 등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본 여인들 중의 하나로 소개된다. 그리고 그녀는 마르 16,1-8; 요한 20,11-18 등에서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인물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마르 16,1-2) 요한복음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그리고 마르 8,1-10에서 예수님은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언급되는 달마누타(Dalmanutha)는 막달라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요세푸스의 막달라
요세푸스는 타리케아, 곧 막달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타리케아는 강력한 요새도시이자 지역주민들이 겐네사렛이라고 부르는 호수에 접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입지를 갖춘 곳이었으며 반란군 전체가 여기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리케아도 티베리아 처럼 산기슭에 세워진 도시로, 요세푸스가 호수에 맞닿아 있는 부분을 포함한 도시의 모든 면에 견고한 성벽을 쌓아올렸던 곳이다. 물론 그 성벽은 티베리아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다. 티베리아 성벽은 반란 초기에 요세푸스가 직접 많은 자금과 많은 힘을 들여 축조했던 반면 타리케아는 그 나머지 자금만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유다 전쟁사』 3권 463-465)
그리고 그는 기원후 67년경에 막달라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다시 진군하여 티베리아와 타리케아의 중간 지점에 진을 쳤다. … 뗏목이 완성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호수로 도망친 적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규모의 부대를 뗏목에 태워 호수로 진격시켰다. 호수 위에서 로마군에게 쫓겨 한곳으로 집결한 유다인들은 로마군이 사방으로 포진한 육지로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들과 대등하게 해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유다인들의 배는 크기가 작고 약탈용으로만 적합했기 때문에 로마군의 뗏목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방식으로 수많은 유다인들이 호수 곳곳에서 죽어갔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배가 포위된 채로 호수 기슭으로 내몰려서 도망쳤다. … 그러나 배가 기슭에 닿기도 전에 많은 수의 유다인이 상륙 도중 창에 찔려죽었고, 육지로 올라온 자들도 그곳에 대기 중이던 로마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에 호수는 피로 물들고 시체가 넘쳐났다.”(『유다 전쟁사』 3권 462-530)
고고학적 발굴
고고학자 코보(V. Corbo)는 1971-1973년, 1975-1976년에 막달라를 발굴하였다. 도시는 인상적인 거리들과 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샘은 오늘날에도 솟는다. 그리고 막달라에는 기원전 1세기에 세워져서 기원후 1세기 중반까지 사용된 작은 회당도 발견되었다. 고고학 탐사는 도시 남쪽에서 망루의 기초도 발견하였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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