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나는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4,18).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14,28).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들이다. 왜 이런 말씀들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다른 ‘파라클리토’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 복음서에서 파라클리토는 ‘진리의 영’ 또는 ‘성령’을 위한 칭호로 사용된다. 파라클리토라는 단어는 요한 복음의 네 곳(14,16.26; 15,26; 16,7; 16,12-14)과 요한의 첫째 서간에만 나타난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예수님도 파라클리토라고 불리며 하느님 옆에서 죄인들을 위해 변호하신다(1요한 2,1).
파라클리토는 무슨 뜻일까? 파라클리토는 ‘청하다, 충고하다, 초대하다, 위로하다’ 등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 ‘파라클레오(parakle?)’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호자, 변호자, 옆에서 도와주는 자, 법률상담자’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
파라클리토는 요한의 시대에 매우 풍부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의미가 풍부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번역하지 않고 파라클리토를 그냥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우리말 성경은 ‘보호자’로 번역했다.).
파라클리토에 대한 첫 번째 약속(14,15-23)
파라클리토는 예수님이 떠나시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진리의 영이다. 그 ‘진리의 영’은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며, 제자들 ‘옆에’, 제자들 ‘안에’ 계실 것(14,16-17)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백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것은 성소나 성전으로 상징화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충실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임마누엘 약속은 신약시대에 와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1,14) 육화 사건과 성령이 오심으로 삼위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14,23)사건으로 실현된 것이다.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는 파라클리토(14,26)
또 다른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들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게 하는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14,26). 특히 성령의 중요한 역할은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보존하여 성경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까지 남겨주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목격증인들이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요한 복음서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그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이끌어주신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본 것을 전하셨던 것처럼, 성령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 그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신다.
제자들의 변호자인 파라클리토(15,26-27: 16,8-11)
성령의 세 번째 역할은 세상의 증오와 반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이다. 파라클리토의 증인 역할은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난다(15,26-27).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10,19-20).
그러니까 예수님이 외적으로 활동하셨던 것을 파라클리토는 제자들을 통해 내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으므로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한 파라클리토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8-11). 세상은 믿기를 거부하는데 바로 이것이 죄인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의롭지 못함을 증명하려 했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어 그분의 의로움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 심판을 받으신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성령은 세상의 우두머리(사탄)가 심판을 받아 쫓겨났다고(12,31) 바로잡아 주셨다.
모든 진리로 이끌 파라클리토(16,12-15)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16,12-13).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지만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6,60) 하고 떠나는 제자들이 생겼다.
성전 정화 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는 말씀도 제자들은 부활 이후에 가서야 그 참뜻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었다(2,22; 12,16 참조). 이것은 부활 이전과 이후에 그들에게 믿음의 이해 차원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호자가 오셔야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전망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돕는다. 그런데 진리의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대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신다(16,14-15). 그런데 이 약속에는 새로운 것이 눈에 띈다. 성령은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6,13 참조).
이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보존하게 한다는 말씀과 충돌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활동하신 예수님과 지금도 계속 활동하고 계신 성령은 나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올 일들”이란 장차 있을 십자가 죽음과 부활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성령의 예언의 은사도 포함한다(1코린 12,28-30).
“생수의 강”들이 흘러넘쳐야…
결국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의 역할과 거의 같다. 예수님은 성령의 형태로 다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 생활을 통해 아버지의 현존을 세상에 보여주셨고, 성령은 신자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세상에 보여주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믿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그 안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넘쳐 구원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해주신다(7,38-39).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와 통교를 하게 하신다(14,21.2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삼위를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살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성령으로부터 평화와 기쁨의 선물을 결과로 받는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고 성령을 받을 때 평화의 선물을 받았다(20,20-21).
미사 중에 삼위 하느님 이름에는 각각 ‘함께 있다.’는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 아버지 이름은 “야훼”(있는 나, 함께 있는 나),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사신 분”, 파라클리토는 “옆에 불린 자”로 불리니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면서 파라클리토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신 것이다. 옆에 있는 자, 힘들 때 변호해 주는 자, 위로자, 이보다 더 좋은 멋진 친구가 어디 또 있을까?
며칠 전 작은 일화가 있었다. 추석 준비로 수녀원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필자는 이 글도 써야 하고 할 일이 많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가 원장수녀님으로부터 사랑이 없다고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기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성경 구절이 나온 것이다. 깜짝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한편으로 너무 부끄러웠지만 속으로 감사드렸다. 파라클리토께서 공동체에 함께 계심에, 그리고 사랑 없는 나의 태도를 일깨워 주셨음에….
기도
저희의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에 저희는 희망의 닻을 내립니다. 성령께서 몸소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저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로마 8,26).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 오소서, 성령님! 파라클리토여!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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