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해설과 묵상 (30)
“이렇게 여호수아는 이 모든 땅 곧 산악 지방, 온 네겝 땅, 온 고센 땅, 평원 지대, 아라바, 이스라엘 산악 지방과 그 평원 지대를 정복하였다”(여호 11,16).
여호수아기는 제1부(여호 1-12장)를 마무리하며 11장 16-23절에서 결론격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산악 지방과 평원 지대를 비롯한 가나안 땅을 정복했음’을 강조한다. 네겝 땅은 가나안 남쪽에 있는 지역이고 고센 땅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지역이며, 아라바는 사해 지역을 뜻한다. 여호수아가 이런 지역을 정복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지역에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집트를 탈출한 노예들의 무리가 성곽도시에서 높은 문명을 누리며 살던 가나안 원주민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정복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정착은 전투와 공존, 조약과 혼인 등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다양한 무리가 매우 다양한 방법과 경로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했다고 보아야 한다. 시메온과 레위 지파의 사람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초기 그룹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에 편입된 씨족들(칼렙 가문, 카인족)은 남부 지방을 통해 평화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 유다 산악지대에 정착해 있던 가나안 사람들과의 조우는 호르마, 헤브론, 드비르 등지에서 몇 번의 전투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때는 외부에서 들어온 히브리 문명과 가나안 문명이 충돌과 공존을 거치는 시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그 동안 세계 정치와 역사를 이끌던 동력인 동서 냉전체제도 끝났다. 그 뒤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놓고 많은 학자가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 있는 책 두 권을 들라면, 1996년 미국 하버드대학 새뮤얼 헌팅턴이 쓴 <문명의 충돌>과 199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하랄트 뮐러가 쓴 <문명의 공존>이다.
헌팅턴은 동서냉전이 종식된 뒤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과 대립구조는 종교를 중심으로 한 문명권 곧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과 유교문명의 갈등과 대립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슬람문명과 유교문명이 연합해 서구문명에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헌팅턴의 문명충돌 이론은 내용이 도발적이어서 처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런 비판을 대표하는 학자가 뮐러다. 뮐러는 헌팅턴이 냉전시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곧 헌팅턴은 세계를 ‘우리’와 ‘그들’, ‘선’과 ‘악’으로 양분하고,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문명을 들어 앉혔고, ‘공산권’과 ‘자유세계’의 대치가 ‘서구문명’과 ‘비 서구문명’의 대치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노선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구조요 삶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충돌과 투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76-480년경) 이래 서양인들에게 뿌리 깊은 사고방식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파악한 투쟁과 불화는 조화를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투쟁의 과정 내지는 투쟁의 가능성이 주는 긴장이 삶의 활력을 보장한다는 의미다”(김용석,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막을 거쳐 기원 전 1200년경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농사를 지으며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도망친 유목민의 무리가 가나안의 농경민족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몰아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함께 어울려 살 수 밖에 없었다.
묵상주제
문명의 충돌과 공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와 문화가 만날 때는 충돌과 갈등이 있기 마련이지만 공존을 모색해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부부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이론이다.
[2013년 1월 27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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