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서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2,3서
편지는 멀리 떨어져 사는 이들이 주고받는 일종의 메시지 전달 방식입니다. 초세기에는 소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는데요. 사도들 또한 신자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야단을 치거나 훈계하려고, 중요한 교리를 설명해 주려고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간혹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쓰곤 했던 것 같은데요. 편지를 이용해서 서로 간의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가족끼리도 종종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신약성경의 편지들
대개 신약성경에 담겨있는 편지들은 신앙적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초세기 신자들은 편지를 받아 읽은 뒤 서로 돌려 읽곤 했습니다(콜로 4,16-17).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지들이 하나의 서간집으로 엮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신약성경에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편지’는 보통 짧고 비공식적인 글월을 가리키므로, 우리말 「성경」의 공식 표기에서는 글을 써 보낸 이를 존중하는 뜻이 담긴 명칭인 ‘서간’으로 통일하였지요.
이렇게 해서 신약성경에 들어온 편지는 요한 묵시록을 포함해 모두 22권입니다. 27권 가운데 22권이니, 분량으로만 본다면 신약성경에서 편지 빼면 남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과 이렇게 중요한 신약성경 편지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구체적 상황을 알아야 길이 보인다
대개 편지는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구체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발신자나 수신자가 관련된 어떤 구체적 상황 때문에 편지를 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신자는 편지를 쓰면서, 수신자가 편지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담습니다.
만일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 편지에 담는 내용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제3자가 그 편지를 읽게 되면, 편지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곧, 발신자가 편지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신약성경에 담겨있는 편지들 가운데는 이런 식으로 적힌 편지들이 제법 됩니다. (특별히 바오로의 서간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당시 시대상황이나 교회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신약성경 편지를 읽게 되면,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편지를 읽으려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수신자 교회가 처해 있었던 상황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정보들을 편지 내용 안에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들의 도움을 받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편지를 다룰 때마다 해당 편지와 관련된 상황들을 설명드릴 겁니다.
오늘 읽는 신약성경
사실, 신약 편지들은 오늘날의 우리를 염두에 두고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처해있는 처지나 현실은 1세기 때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다툼소리, 여러 가지 불륜과 불의, 사회적 폭력, 참된 믿음을 호리는 여러 가지 잘못된 교의들 등이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신약성경 편지들은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고 난 뒤에 라오디케이아 교회에서도 읽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라오디케이아에서 가는 편지를 여러분도 읽으십시오”(콜로 4,16).
이번 호에서는 요한의 세 편지들을 간략히 다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시기를 지내면서 평일미사 제1독서로 요한이 보낸 편지들을 읽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성탄축제를 지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기뻐하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초세기 그리스도교가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실제 육신을 취한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 왔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영적인 것만 좋은 것, 구약의 하느님은 악을 만들어낸 악신이며 예수님의 아버지는 선신, 영적인 지식은 좋은 것이고 세상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식의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초세기 공동체에서 이러한 영지주의에 물들어 하느님에 대한 영적인 지식만을 추구하고, 그 신비한 지식만 가지면 만사 오케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것 자체가 의미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매우 소홀했습니다. 아니, 도외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영적인 지식만을 추구하며, 자신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빛 속에 머무는 이들이고, 영적인 지식이 없는 이들은 모두 어둠 속에 머무는 이들이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영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 지식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며, 남들에게 알리기를 꺼려했습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비난합니다. 사실 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교리를 퍼뜨리면서 믿음에 충실한 교우들을 현혹하는 그리스도의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1요한 2,19.26; 3,7; 2요한 9-11).
친교와 사랑
특히 요한은 첫 번째 편지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육신을 취하시어 세상 속에서 사셨음을 강조합니다(1요한 4,1-6). 또한 영적인 지식만을 추구하며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는 결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라고 강조합니다(4,7-21). 그러면서 진정 하느님과 사랑 안에서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나누라고 초대합니다(1,3).
요즘도 간혹 피정이나 강의를 쫓아다니며, 영적인 지식, 영적인 즐거움, 영적인 편안함만을 쫓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 참으로 훌륭하고 권장할 만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삶,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에는 소홀하며 오직 영적인 안식만을 추구하거나, 영적인 지식만 축적하려 든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또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16).
* 염철호 사도 요한 - 부산교구 신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으며, 역서로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바오로딸, 2012년)이 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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