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해설
신약에게 구약은?
여러 해 전의 일이 떠오릅니다. 저희 수녀원에 평일미사를 드리러 오시던 신부님이 신약을 전공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구약으로 논문을 쓰겠다고 하니까 뭔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저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혼잣말로 중얼거리셨습니다. “지금은 벌써 신약시대인데 왜 구약을?”
신약은 구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 신약에게 구약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어려운 시험문제처럼 보이시는지요?
대답은 더없이 간단합니다. 신약에게 구약은 성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소중히 여기듯이 신약은 구약을 소중히 여깁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는 모두 유다인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첫 그리스도인들도 대개는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은 유다교의 경전이었던 구약이었고,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유다교와 점차 구분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성경을 그대로 자신들의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책들인 복음서들과 바오로 서간 등은 나중에 비로소 그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신약이 구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데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묵시적인 인용이란 신약의 본문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실상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사용되었던 표현을 암시하거나 빌려 쓰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에 주일학교 학생들이 콩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변형한 것이었습니다. 초등부 어린이들까지도 그 콩트를 보면서 웃는데 저는 아예 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묵시적으로 인용된 본래의 그 프로그램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은 많은 구약 본문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을 모르고서는 그 깊은 뜻을 알아듣기가 어렵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게 될 수 있는데, 신약이 그런 식으로 구약을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구약이 이미 성경으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묵시적 인용을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저자는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표현들을 넌지시 시사함으로써, 구약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표면적으로 그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명시적 인용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입니다. 모두 28개의 인용문들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아시는 예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마태 1,23)이지요.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그 인용문을 도입하면서 마태오 복음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마태 1,22)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약은 구약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들은 논증을 위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신약의 두 곳에서는 구약의 말씀들이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2티모 3,16과 2베드 1,21 참조).
구약은 성취되어야 한다
이렇게 신약에게 구약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해야 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δει가 이러한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루카 24,44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루카 복음 24장의 문맥은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금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여 “침통한 표정”(루카 24,17)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해주신 일은 “성경 전체”(루카 24,27)를 설명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성경 전체”는 구약성경 전체였습니다!
여기에서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구약을 성취되어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겼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에 구약의 권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성취되어야 했고, 그 말씀이 참됨을 믿기에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이해할 수 없던 예수님의 사건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 계획의 실현이며 완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구약에 일치한다
그래서 신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다고 밝혀줍니다. 교황청성서위원회 문헌인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에서는 여러 가지 예들을 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째는 루카 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루카 4,17). 다른 말로 하면, 구약이 그분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러고는 두루마리를 펴시어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루카 4,18-19). 이사 61,1-2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읽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엇으로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정당화하고 계시지요? 네, 구약의 예언입니다. 나자렛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고향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거슬러 예수님께서 증거로 드시는 것이 이사야서입니다. 당신에게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1코린 15,3-5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전해줍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의 요약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성경”은 물론 구약입니다. 신약은 아직 없었습니다. 첫 번째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의 삶 안에 있었던 사건들이 구약에 부합된다는 것을 믿음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신약시대 첫 세대 사람들의 신앙은 이렇게 구약을 토대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할 수 있으시고 또 죽음으로 부터 부활할 수 있으시다는 것, 그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게 해주는 것이 구약의 권위였습니다.
우리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일부러 서서히 뜸을 들여가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을 먼저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구약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너무 뜻밖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상상해 보신다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아직 형성되는 중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쓰고 바오로 사도는 서간들을 썼지만 그것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구약,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자렛의 예수라는 저 인물, 기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죄인들을 용서하는 저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증언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 지으며 유다교에서와는 다른 그리스도교 나름대로의 전승이 교회의 삶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서로 다른 그 두 전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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