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4) 강 - 삶의 무대
신성 있다고 믿어 강의 범람까지도 인격화
지금까지 하늘신ㆍ달신ㆍ바람신에 대해 배웠다. 고대 근동에서 하늘은 최초의 신이자, 최고의 신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느님을 최고신으로 받아들였고 하늘을 하느님이 만든 장소로 생각했다. 또 고대 근동에서 달신은 왕권의 상징으로 최고신의 피가 흐르는 강한 남성신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달신 숭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들은 문화로 받아들였을 뿐 신으로 숭배하지는 않았다.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자 하느님 현현의 전조이다. 창세기 1장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원대한 계획을 갖고 기술한 용기있는 텍스트다.
강(江)은 히브리어로 '나하르'다. 구약성경에 120번 이상 나오는 무척 친숙한 낱말이다. 이 말은 지리적 강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화적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강'은 '바다'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강은 물을 제공한다. 인류의 4대 문명인 황하ㆍ인더스ㆍ나일ㆍ메소포타미아 모두 강에서 비롯됐다. 물이 흐르는 곳에 초목이 자라고, 문명도 자란다. 대부분 종교에서 강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볼 수 있다.
강에 대한 경외심
고대 근동인들은 강에 대해 경외심을 느꼈다. 다시 말해 강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합리적 세계관과는 다른 마음으로 자연을 섬겼다. 그들은 강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백이 축적된 심원한 '의미의 세계'에서 살았다.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젖줄이다. 이 강을 히브리어로는 '예오르'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네일로스'라고 한다. 두 낱말 모두 '기간' 또는 '계절'을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어에 뿌리를 둔다. 곧 나일 강의 이름은 '한 계절' 또는 '(돌아오는) 기간'이라는 뜻으로, 일 년에 한 번 나일 강이 범람하는 기간과 관련 있다. 나일 강의 본질은 범람이다. 고대 근동의 신은 대부분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둔 인격신이다. 흥미롭게도 나일 강의 경우 강 자체는 인격화되지 않고 강의 범람만 인격화됐다. 나일 강의 범람의 신 이름이 '하피(Hapi)'다. 이 신은 배가 불룩 나온 남신이지만 여신처럼 젖가슴이 크다. 머리에는 파피루스 덤불이 자라고 손에도 식물을 들었다. 하피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의 19왕조(람세스 2세가 속한다) 시대부터 상(上)나일과 하(下)나일의 한 쌍으로 묘사됐다. 나일 강의 범람의 신 '하피'는 태초의 심연과 관련된 생명력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다.
이집트 종살이를 오래 겪은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문화에 익숙했다. 히브리인들은 나일 강의 종교적 의미와 하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오직 이 하피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침묵의 탈신화' 현상을 보인다. 오히려 나일 강의 범람을 하피가 아닌,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일로 묘사한다. 성경에는 주님께서는 나일 강이 부풀었다 잦아드는 일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나온다.(아모 8,7-8 참조)
강이 지닌 신성
인류 4대 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두 곳이 바로 고대 근동지역에 있다. 그 중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그리스인들은 셈족의 전통을 따라 이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라고 번역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은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이미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두 강은 모두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성을 지녔다. 두 강의 이름 자체가 신의 이름이었다. 고대 바빌론어 이름에는 '마르-푸랏팀'(유프라테스의 아들)이나 '움미-이디클라트'(티그리스는 나의 어머니) 등이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강의 신성은 세월에 따라 점점 약화된다. 후대 문헌일수록 두 강이 신으로 언급되지 않고 그저 지명으로만 쓰인다. 엔키(Enki)신이 있기 때문이다. 엔키는 수메르 시대부터 일곱 주신(主神) 가운데 하나였고, 최고신 아누(하늘신)의 아들이자 풍요의 신 두무지의 아버지였다. 엔키는 선하고 좋은 신이다. 엔키의 어깨너머로 물고기가 노니는 강물이 흐르고 그의 모자에는 식물(생명의 나무)이 자란다. 수염이 긴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인상이다. 엔키는 고대 근동지역에 정기적으로 홍수를 일으켜 비옥하게 만드는 풍요의 지하수신이요,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주는 선한 신이었다. 엔키는 대표적인 선신이기에 대중에게 무척 사랑받았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엔키가 강물의 신성을 대표했기 때문에 두 강의 신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대 근동지역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엔키의 흔적을 구약성경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5일, 정리=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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