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풀이 FREE] 십자가의 길과 골고타
- 사진 :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우리가 성당에서 막연히 십자가의 길을 묵상할 때는 경건하고도 전례로 가득한 예루살렘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을 방문하면, 북적이는 소음과 아랍 시장, 일 달러짜리 잡상인들과 소매치기…. 이것이 예루살렘의 첫인상이다. 누가 이곳에서 수난 겪은 일이 있었느냐는 듯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구경하는 상인들을 헤치고 십자가의 길을 걷노라면, 내 신앙마저 구경거리가 된 듯한 분심이 든다. 왜 이 거룩한 곳이 방치되어 있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2,000년 전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도 비슷했을 것 같다.
파스카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인파 속에 형틀을 지고 골고타로 가는 죄인의 행렬은 눈길을 끄는 구경거리였고,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며 혀를 차기도 했을 듯싶다. 그러다가 키레네 사람 시몬이 끌려 나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갔지만, 당시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로마인들은 형장에 가기 전에 죄인이 죽으면 의미가 없다 생각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까지 살아 있도록 짐을 덜어 주었다. 사실 십자가형은 고대 근동에서 뿌리 깊은 처벌 방식이었고, 구약에도 언급된 ‘나무에 매다는 형’에서 유래한 듯 보인다. 창세 40장 요셉 이야기에는 제빵 시종장이 파라오의 생일에 나무에 매달려 처형되었고, 사울 왕과 세 아들이 전사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은 그 시신을 벳산 성벽에 매달았다(1사무 31). 에스테르기에는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한 하만이 모로도카이를 위해 준비했던 말뚝에 자신이 매달려 죽었다(7,9-10).
기원전 8세기 잔인함으로 악명 높았던 아시리아는 포로들을 자주 나무에 매달았고, 이 방식이 로마까지 이어져 야만인(로마인이 아닌)들을 처리할 때 종종 등장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보통 2~3일 정도 고통을 겪다가 몸이 늘어지면서 호흡기를 압박하고 질식사한다는데, 이 지독한 고통 때문에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했는지 그 인간적인 번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순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지만, 죄 없이 다른 이를 위해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인성을 누르고 고통을 감내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지표를 배운다. 그리고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것처럼, 때때로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 때, 이름 지을 수 없는 분노, 질투, 탐욕, 이기심이 마음에 그늘을 드리워 괴로울 땐, 모르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들의 위대한 사랑, 그 넓고 깊은 용기를 생각하며”(‘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중에서), 작은 나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때,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삶과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묵상해 본다.
[2013년 3월 31일 예수 부활 대축일 인천주보, 김명숙 소피아(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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