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해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단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아들은 누구일까요? 문장의 앞부분은 의도적으로 생략했고 이 구절을 성경 어느 부분에서 인용한 것인지는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2단계. 마태오 복음에서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1,2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동정녀는 누구이고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그 ‘아들’은 누구일까요? 네, 물론입니다. 동정녀는 성모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3단계. 마태오 복음에서 인용한 이사야서에서는,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마태오 복음을 모르는 아하즈가, 이 말이 칠백여 년 뒤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 이름 임마누엘”
이것이 우의적 해석의 한계였습니다. 지난달 마지막에, 우의적 의미는 본문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가 아니라 덧붙여진 의미라고 했지요. 앞의 예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이사야서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가 했던 말이 예수님에게서 더 충만하게 실현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순전히 이사야의 말만 듣고서는 그러한 의미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이를 두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의적 해석을 하는 주석가는 “본문에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을 알아내려면 다른 본문의 자구적 의미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사야가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시리라는 것을 예언했다고, 우리에게 놀라운 신비를 알려준 위대한 예언자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미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말에서 그러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예언자에게 불경한 말을 하는 것 같으신지요?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사야가 말을 하고 있는 대상은 아하즈 임금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는 더 분명하게 말하려고 “이사야는 우리에게 관심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좀 표현이 강한 것 같으니까 “이사야의 1차적 관심은 우리가 아니라 기원전 8세기 사람들이었다.”고 해두지요.
더 확실한 것은 “아하즈는 우리에게 관심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사야서 7장의 문맥은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하느님께 표징을 청하라고 하는 중입니다. 700년 뒤에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아하즈에게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아하즈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지켜주시리라는 보증이 될 표징을 보려고 700년을 기다려야 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긴 설명 빼고 얘기하면, 대개 이사야서 자체 안에서 이 “아기”는 아마도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젊은 여인”은 아하즈의 아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는 “처녀, 동정녀”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젊은 여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동정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마태오는 그 70인역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구적 의미로 돌아감
그렇다면, 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은 오해일까요? 전반적으로 말해서, 구약 특히 예언서들을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읽는 것은 부당한 일일까요?
구약 예언의 많은 말씀들 가운데 제가 이사 7,14를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하고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고 밝혀줌으로써 이 해석의 정당성을 성경의 권위로 확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1차적 의미는 자구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저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이사야는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을까? 이것을 묻지 않고 성경을 해석했을 때에는 그 해석이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본문이 여러 시대의 독자들을 만나면서 저자가 생각한 것을 넘어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의 살아있는 생명력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라는 기준이 없다면 독자는 마음대로 성경을 주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교부들의 주석과는 상당히 방향이 다른 연구가 한참 발전하게 됩니다. 중세에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자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근대 이후의 성경 연구를 주도해 왔고, 그 여파로 교부들의 주석은 잊히기도 했고 구약과 신약은 이전과 같이 밀접한 관계 안에서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구약 저자들은 신약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지요. 그럼 마태오 복음서에서부터 구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과 성취
지난달에 말씀드린 새옹지마 고사를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말 한 마리를 얻게 된 일이 좋은 일로 여겨졌다가 나쁜 일로 여겨졌다가 다시 또 좋은 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을 어떤 범위 안에서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맥락 안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사건 또는 하나의 말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추리소설을 보면 그런 것이 많지요. 소설의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저자가 이런 저런 단서들을 숨겨놓았어도 둔한 우리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지막에 가서 탐정이 범인을 밝히고 그가 어떤 단서들을 가지고 범인을 찾았는지를 설명해 줄 때에야 “아, 그랬구나!” 하게 됩니다.
사실은 추리소설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부분은 전체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 ‘전체’가 달라지면 부분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에 적용됩니다. 유다교 신자가 구약을 읽을 때와 그리스도교 신자가 구약을 읽을 때에는 그 ‘전체’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 유다교 신자에게는 신약이 없기 때문에 - 구약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임마누엘 예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신약에 비추어서 이사야 시대의 사건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점진적이면서도 단일하기 때문에, 점차로 이루어져 가는 그 계획 안에서 앞부분의 사건들은 나중에 충만하게 실현될 하느님 구원의 한 단계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모세 시대에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 바빌론에 유배 갔던 이스라엘이 뜻밖의 방법으로 해방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이 사건을 첫 번째 이집트 탈출을 능가하는 더 놀라운 이집트 탈출로 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해방’이라는 단일성 안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 우리는 그 밖에도 많은 중요한 주제들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이는 하느님의 단일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단일한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을 유다인들과 구별 지어 줍니다. 이‘성취’의 개념에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을 이어가시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새로움 없이 또는 단순히 연속적인 단계들 가운데 한 단계로서 당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성취’라는 말에는 이전 단계들과는 다른, 어떤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실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마지막 말은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인들의 희망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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