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 프리스카
바오로 사도 선교활동의 협력자
교회 초창기에 활동했던 사도 바오로의 업적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매우 아꼈던 선교사 프리스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프리스카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협력자였다. 그만큼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여인이었다.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도 프리스카에 대한 존경과 극진한 마음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신앙의 일로 여행
프리스카는 사도행전에서 프리스킬라로 불려졌다. 그는 유다인이었던 남편 아퀼라와 함께 로마에서 살았다. 이 둘은 로마에서 매우 일찍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부부는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을 듣고, 48년경 로마를 떠나 코린토로 이주하였다. 당시 코린토는 지중해 서부와 지중해 동부가 서로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벌이던 중요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프리스카와 아퀼라는 자리를 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같은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바오로는 프리스카의 집에서 머물면서 함께 일을 하였다(사도 18,1-4 참조). 그는 그곳에서 약 일 년 반 정도 머무른 다음, 코린토에서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였다. 프리스카의 집은 당시에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새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모이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이런 복음 선포에 대해 갈수록 불만을 품고 상황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으므로, 바오로는 코린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프리스카와 아퀼라도 바오로와 함께 떠났다. 긴 여행 끝에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인 에페소에 도착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일단 아주 짧게 체류한다. 그는 나중에 오랫동안 머무르기 위해 에페소에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에페소 신자들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벌써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리스카와 아퀼라는 다시 코린토에 돌아가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천막을 만드는 생업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사도 18,18-22 참조).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유다인 학자 아폴로와의 만남이다. 아폴로는 성경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에페소의 회당에서 좋은 언변과 설득력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사도 18,24-28 참조). 그런데 그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스카와 아퀼라는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을 더 깊게 설명해 주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는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26절)
신학적 소양을 갖춘 여인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프리스카의 이러한 가르침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여성이 종교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아주 낯설고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도 있다. ‘자기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방탕한 탈선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성은 유다인 신앙생활의 영역에서까지도 늘 종속된 역할만 떠맡았다. 곧 늘 가르침을 전해 받는 역할을 맡았을 뿐, 가르치는 역할을 맡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스카는 자기 남편과 더불어 매우 학식이 높았던 남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교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덕망이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이름은 자기 남편보다 먼저 거명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고대의 관습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성서의 다른 세 곳에서도 거듭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에서 이 여인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프리스카는 에페소의 가정공동체 안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남편 아퀼라와 더불어 공동으로 공동체를 지도하였다(1코린 16,19 참조).
프리스카가 어떤 신앙과 어떤 용기, 그리고 어떤 정열을 가졌었는지 로마서 16장은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준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프리스카와 아퀼라 - 여기에서도 프리스카가 아퀼라보다 먼저 거명된다. -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16,3)이라고 소개하면서 짧은 시간에 로마에서 가정공동체를 설립했다고 증언한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는 이 부부가 자신을 위해 그들 삶을 온전히 투신했다고 말한다. 아울러 바오로는 “이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4절) 하고 덧붙인다. 우리가 바오로의 이 증언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가정공동체가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점을 의식한다면, 이 유다계 그리스도인 부부가 초대교회의 생성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부를 모든 측면에서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신약성경이 이 부부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기억은, 당시에 직장에서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장을 위한 참여와 투신 등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당연하게 이루어지던 공동협력의 한 단면과 같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이런 공동협력은 그 부부의 혼인에도 풍요로운 체험이 되었다. 이 부부는 실제로 다른 부부에게 혼인생활의 귀감이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갈라 3,28)를 이루며 살았다.
누구의 부인만이 아니다
프리스카의 이러한 탁월한 모습은 신앙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시대 역사적인, 문화 - 종교적인 배경에서도 고려될 수 있다. 그리스 교부 크리소스토모는 프리스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감탄을 남겼다. “어떤 여왕이 그런 광채를 낼 수 있습니까? 그 누가 천막을 만드는 여인처럼 칭송받을 수 있습니까? 페르시아인과 스키타이인과 트라키아인, 땅 끝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을 칭송할 것이며, 복되다 일컬을 것입니다.”(로마서에 대한 강론 31)
프리스카는 남편의 그늘 속에서만 살지 않았다. 그는 전적으로 자립하는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용기있고, 신학적으로 학식을 갖추고, 강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여인은 당시 교회가 생성되는 초창기에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쌍백합, 제16호, 2007년 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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