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지팡이] 불쌍하다 - 루가가 깨달은 하느님과 그 아들
[1] 우리가, 아니, 내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맨 처음 입에서 나올 말은 무엇일까?
상상이 아니라, 성서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그분께 달려든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자면,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가 될 것 같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7,13). 나병환자들이 당시의 율법에 따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큰 소리로 예수께 외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먼저 그들에게서 배운 이 말로부터 시작한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우리 모두는 자신을 돌아볼 때 거기에서 부족과 약점만 찾아낼 수 있을 뿐이고, 무언가 그럴듯한 것이 혹시 거기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권능이 나에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게”(2고린 12,9) 된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로마 8,3) 쉽게 죄에 떨어지게 된 뒤부터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가 되었고,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측은히 여기는 심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태양보다 더 거센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는 하느님의 마음속에서 인간의 모든 죄악은 흔적도 없이 정화된다. “제가 이 세상의 모든 흉악한 죄를 다 지었다 해도 하느님께 대한 저의 신뢰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비하면 제가 지었다는 그 모든 죄악을 다 모아도 그것은 물 한 방울에 불과한 것임을 저는 잘 아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가 산 사람이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죽음을 바로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2]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비 유다인 곧 이방인 출신이었던 루가가 깨달은 하느님도 바로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그는 이 놀라운 소식을 온 인류에게 전할 사명을 의식하고 복음을 썼다.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에 관해서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것”(루가 1, 2-3 참조)을 자료로 했지만, 그것을 선택하고 요리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마음속 깊이에 간직하고 근본 진리로 삼았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였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이 점에서 다른 공관복음서에 비해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제자였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은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요나 4,2) 분이었다. 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까지 기록한 그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의 이 측은지심, 그분의 무한한 자비 바로 그것이었다. 이 무한한 자비는 말 그대로 어떤 한계나 경계선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경계선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담이었다.
루가가 깨달은 하느님의 이 끝없는 자비는 그 옛날 요나가 혹독하게 경을 치르고 나서 겨우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잔인하게 억누르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눈에 저주를 받아 당장 망해버려야 할 땅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거기로 가서 현지인들에게 큰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정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태풍을 만나고 고래 뱃속 깜깜한 굴속에서 삼 일 동안이나 숨막혀 죽을 듯한 체험을 하면서, 그야말로 옛 관념에 죽었다가 새로운 깨달음 속으로 살아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느님 자비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 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 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요나 4,10-11)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에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만큼이나, 니느웨 사람들이 나서 자라는 데에도 아무 한 일이 없는 요나에게는 그들이 다만 철천지원수요 저주의 대상일 뿐이었지만, 창조주 하느님께는 그들을 포함해서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모두 당신이 친히 지어내신 작품, 당신이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 2,14-16). 이런 바오로의 가르침이 루가에게 그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것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소식이었고, 인간의 상식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참된 의미의 혁명을 가지고 와야 할 것이었다.
[3] 그런데 자기네만 선민이요 하느님 백성이라고 굳게 믿어온 유다인들에게 그것은, 고래 뱃속에 들어가기 전의 요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가 아무리 크고 저항이 심해도 산이라도 옮길 듯이 굳건한 바오로의 깨달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나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3-6 참조) 하는 바오로의 확신은 루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복음은 비로소 유다의 경계를 벗어나 온 세계 전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루가가 쓴 복음에서 ‘자비’ 혹은 ‘측은지심’은 하느님이라는 나무의 줄기를 표현하는 말이고, 거기에는 여러 잔가지와 잎이 붙어 있다. ‘은총’, ‘호의’, ‘선하심’, 한 번 맺은 계약은 비록 상대방이 깨뜨리는 일이 있어도 이쪽에서는 끝까지 지키는 ‘충실’ 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동사들이 그것들이다. 이 말들은 모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그 관계는 친구 사이처럼 평등한 것이 아니라, 왕과 노예 사이의 관계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한 쪽으로 거의 무한히 기울어진 것이다. 아내가 자신을 떠나 외간 남자와 놀아나는데도 끝까지 충실했던 호세아 예언자는 그런 관계를 조금이나마 몸으로 체험하였다. 또 엄마와 갓난아기 사이도 그 관계를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다. 실제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하나인 히브리어 ‘라함’은 ‘엄마의 가슴’에서 유래한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가냘픈 젖먹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 자기 몸의 일부였다가 세상에 나와 자기 몸에서 나오는 젖으로 먹여주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는 생명이 병들어 꺼져갈 때 느끼는 단장의 아픔, 아기를 향해 온몸과 마음으로 쏠리는 관심과 사랑, 한 마디로 <모성애>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4] 예수께서는 어머니가 아기를 다루듯 사람들을 깊은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셨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제일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이들, 보통 사람들이 멀찍이 세워두고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이들을 찾아 그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셨고, 그들을 만지셨으며, 그들 쪽에서도 당신을 만지도록 내버려두셨다. 나병환자를 만지면 레위기(13-14장)에 나와 있는 율법에 따라 부정을 타게 된다는 점을 잘 아시면서도, 전혀 거리낌 없이 그 썩어가는 몸을 손으로 만지셨다. 온 동네에 잘 알려진 죄녀가 와서 당신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입맞추고 머리털로 닦고 할 때, 그 모든 행위를 전혀 막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7,37-38). 하혈병에 걸려 부정한 몸이었던 여인이 당신을 만졌을 때에도(8,44-47) 그대로 두셨으며, 비유까지 추가한다면, 반쯤 죽은 사람에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대신다(10,34). 그분이 손을 대시면 병은 치유되고 사람은 일어났다. 그분의 자비는 어떤 거리도 뛰어넘어 손이 닿는 거리로 좁혔다. 루가복음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는 부분보다 자기 고유 부분이 반을 넘을 정도로 개성이 강한 복음이다. 이 고유부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끈질긴 기도, 자기만족과 욕심에 대한 경고, 겸손한 자세로 돌아갈 것, 고통에 짓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일 것 등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온다. 나인 동네의 과부(7,11-17),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에 들어온 죄녀(7,36-50), 강도의 칼에 찔려 길가에서 신음하고 있다가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조를 받은 여행자(10,29-37), 친구의 청을 끝내는 들어주고 마는 사람(11,5-8), 당신 어머니를 칭송하는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11,27-28), 어리석은 부자(12,16-21),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13,10-16), 여우같은 헤로데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13,31-33), 수종병자(14,1-6), 불쌍한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라는 말씀(14,7-14), 할 일을 다 하고도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해야 한다는 가르침(17,7-10), 나병환자 열 사람(17,11-19), 억울한 일을 당해 공정한 재판을 호소하는 과부(18,1-8),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가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돌아간 이야기(18,9-14), 잃었던 것을 되찾은 사람의 기쁨(15,1-32), 부자와 거지 라자로(16,19-31), 자캐오(19,1-10), 당신께서 떠나시고 난 다음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주실 때까지 잠시 동안 제자들이 아무 의지할 것 없는 처지가 될 것을 내다보시며 그들의 그런 처지를 미리 알려주시는 표현의 하나로, 이제는 칼과 돈주머니를 가져가라는 지시(22,35-38),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따라 간 백성과 가슴을 치던 여인들(23,27-3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24,13-35), 우도(23,39-43). 이 모든 이야기는 루가만이 전해준다.
[5] 이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잘못된 권력자들로부터는 단호한 태도로 그들을 지키는(헤로데에 대한 태도) 주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이리 떼와 싸우며 양 떼를 돌보는 목자, 자식을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쓰는 부모, 특히 목숨 바쳐 갓난아기를 지키는 엄마의 모습을 닮았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그분의 모성애를 보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생각하면 어떤 인간도 실망할 수가 없다. 이 이야기들 가운데 우선 하나만이라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먼저 외우고 온 존재에 스며들 때까지 계속 자기에게 들려주자.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반드시 새로운 빛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이다. 마리아는 그 모든 사람들의 표상이다. 루가만이 전하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마리아가 보여준 태도를 아주 뜻 깊은 표현으로 전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 2,51 참조).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가난한 사람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의 전형이다. 그분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으로 전해오거나 성서 말씀으로 전해오거나 간에 하느님 말씀이 전해오면 늘 같은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여 오래 간직함으로써, 그것을 안에서 소화하고 당신 것으로 만드셨던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시켜 힘으로 바꿈으로써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 들불처럼 퍼지고 사람들이 거기에서 새로운 빛과 힘을 얻는 것은, 모르는 사이에라도,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본받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에게는 교육을 시키지 않던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마리아께서는 글자도 모르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그분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소화시키는 일에서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대하고, 그분처럼 한 대목이라도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면, 성령의 힘으로 그 참 뜻을 깨닫고 지금 나의 삶에 그것이 주는 빛과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구나 마리아처럼 복된 사람이 된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고 소리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간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쌍백합, 제27호, 2009년 겨울호,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천주교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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