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 아비가일
생명을 전달하고 보호하고 기르는 여성의 사명 보여줘
아비가일은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종종 만나는, 아주 지혜롭고 처세술이 노련한 여인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레베카, 나오미, 유딧 등은 비록 여성이었지만, 자신의 목숨과 자기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나발에게 거절당하는 다윗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다윗은 예언자 사무엘이 죽은 다음에 북쪽 시나이반도에 있는 파란 광야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나발을 찾아 갔다.
나발은 다윗이 영향력을 크게 떨치던 지역에서 가축을 치고 있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나발의 목자들을 괴롭힌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다윗은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나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지만, 나발은 다윗이 보낸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 일을 단호히 거절했다. 사실 나발은 거칠고 아주 인색했던 사람이었다.
이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등장한다. 그는 “슬기롭고 용모도 아름다운”(1사무 25,3) 여자였다. 그는 먼저 자기 남편의 처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거부로 말미암아 다윗이 증오심을 품고 부하들과 함께 나발을 죽이려는 계획을 막기 위해서 빵과 포도주, 밀, 요리한 양 등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내어준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빈다. 이로써 그는 나발을 곤경에서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증오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에서 다윗까지도 보호할 수 있었다.
나발은 술에서 깨어난 뒤 아비가일이 행했던 그 동안의 일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나발은 심장이 멎으면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열흘쯤 지나서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1사무 25,37-38). 그런 다음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청혼을 했고, 마침내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다윗에게 증오를 버리라고 경고
하느님께서는 아비가일을 당신의 축복과 약속을 다윗에게 전하는 전령으로 삼으신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리께서는 주님의 전쟁을 치르고 계시니, 주님께서 정녕 나리께 튼튼한 집안을 세워 주실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한평생 어떤 재난도 겪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리를 쫓아다니며 나리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주 나리의 하느님 앞에서 나리 목숨은 생명의 보자기에 감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나리 원수들의 목숨을 팔맷돌처럼 팽개치실 것입니다”(1사무 25,28-29).
그러나 이 축복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먼저 한 가지 조건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모욕한 나발에게 복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나리께 약속하신 복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어 나리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실 터인데, 지금 정당한 이유 없이 피를 흘리며 몸소 복수하시다가, 나리께서 후회하시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리께 복을 내려 주실 때, 당신 여종을 기억하여 주십시오”(1사무 25,30-31).
감정에 의한 사사로운 법집행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원수를 물리치는 일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목숨을 해치는 복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전쟁의 상황에서 이런 생각과 원칙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낯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이면에 담겨 있는 사상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다. 아비가일은 지금 자기 자신을 생명의 지킴이로 자처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구약성경의 다른 위대한 여인들처럼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다. 여성은 생명을 계속 전달하는 사명만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고 기르는 사명도 있다.
이렇게 하여 아비가일은 다윗을 아주 부례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거부했던 남편의 생명을 대담하게 지킬 수 있었다. 아비가일은 남편이 과거에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지 않았었지만, 그의 생명을 사람의 복수에서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처신하라는 아비가일의 조언을 듣고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접는다. 사실 다윗은 천성적으로 결코 교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윗은 사무엘기 상권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수였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면 자기실현은?
구약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이렇게 제시한다. 곧 올바른 것을 판단하는 건전한 이성과 깨어있는 감각을 늘 유지한 채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단호하면서도 유머가 풍부한, 긴급한 경우에는 어떤 권력자에도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여성이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비록 여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각기 자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삶을 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일치하는 생명, 곧 민족의 생명, 씨족의 생명, 손님의 생명 등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 생명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아비가일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여성들은 오늘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쌍백합, 제33호, 2011년 여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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